산행

순천 조계산 산행 (접치재 → 장군봉 → 천자암 → 송광사)

epician 2019. 11. 25. 22:49

어쩌다 보니 지난 계룡산 산행 이후 다섯 달이나 등산을 못했다.
지리산 천왕봉을 가려고 날 잡고 나면 태풍이 오고, 다시 날 잡고 나면 비가 오고. 날씨 좋을 땐 내가 시간이 안되고. ㅠ.ㅠ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산행하기 좋은 계절은 다 가고, 자켓이라도 한 벌 더 챙겨야 하는 계절이 와버렸다. 날씨를 살펴보니 가볍게 등산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아닌가 싶어, 가까운 곳이라도 얼른 다녀오자 싶었다. 여러 곳을 궁리하다 조계산으로 길을 잡았다.

배변활동 실패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인데, 요즘은 일찍 일어나야 대충 오전 10시쯤이다. 새벽 늦게까지 일하면 정오쯤 일어날 때도 많고. 그렇다 보니 등산 간다고 오랜만에 새벽 5시에 일어났더니 몸이 적응을 못한다.

나가기 전에 집에서 1차 배변 시도... 실패. 순천에 도착해서 순천역에서 2차 배변 시도... 또 실패 ㅠ.ㅠ
이러다 산속에서 일 치르는 거 아니가 싶은 찜찜함이 한가득이다.

경로

산행 경로 15KM (접치재 → 장군봉 → 장안천 → 천자암 → 송광사)

거의 다 가봤던 길이고, 장군봉에서 굴목재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만 초행이다. 처음 가는 이 길이 장박골 정상부 능선길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내심 기대를 좀 했는데, 반은 꽝이고 반은 성공이었다. ㅎㅎ

송광사 구경하는 시간까지 다 합쳐서 6시간 30분 소요.

출발

산행 2~3일 전 즈음엔 당일 자정 비가 약간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산행 전날 일기예보가 새벽 3시까지 내리는 걸로 바뀌더니.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확인하니 비예보는 오전 9시까지로 바뀌었고. 출발할 때 즈음엔 오전 10시까지로 늦춰지더라.

" 일기예보니 중계니?? "

비가 많이 내린다는 얘긴 없으니 우산 하나 챙겨서 나가도 큰 무리 없겠다는 판단에 취소 없이 출발했다.

아침 내 찔끔거리는 비

새벽부터 아침 내내 찔끔찔끔 비가 내린다. 여기서 더 내리지만 않으면, 우산 없이 등산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

접치재

접치재를 들머리로 해서 조계산을 오르는 게 두 번째다. 오래 쉬었던 터라 요번엔 접치재 오르막길이 조금 버겁다. 출발부터 잔근육들은 난리 난리다. 정강이 앞쪽, 발목 뒤쪽, 발등, 발바닥 등등 그간 운동을 못했던 티가 여실히 나타난다.

새벽부터 조금씩 내렸던 비는 양이 많지 않아서 다행히 길은 미끄럽지 않았다.

낙엽이 만든 비단길

늦가을 어쩌면 초겨울 하여간, 길목의 나무들이 한꺼번에 떨군 낙엽으로 등산로가 비단길처럼 보인다. 이렇게 너른 길은 운치가 있었는데, 발길 뜸한 오솔길은 길 윤곽이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종류도 다양한 낙엽
접치재 오르막길

접치재 구간은 볼거라곤 1도 없다. 그냥 운동이다 싶은 생각으로 들숨날숨 거칠게 몰아쉬며 올라간다. 어디쯤 왔나 싶어 핸드폰 꺼내보면 반쯤, 또 한참 걷다가 어디쯤 왔나 싶어 핸드폰 꺼내보면 반의 반쯤 ㅎㅎ

오르막길이 3KM쯤 되는데, 5개월 만의 등산이라 여기가 이렇게 힘든 코스였던가 싶었다.

이름 모르는 앙증맞은 버섯

주변에 조망할 만한 경치는 하나도 없고, 간혹 보이는 이런 것들이 눈요기 거리가 되어준다.

장군봉

길고 길게 느껴지던 접치재 오르막길을 마치고 나서 장군봉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예전에 반대로 걸었던 적은 있는데, 접치삼거리에서 장군봉 방향으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름에 쌓인 등산로

그 안에서 걷고 있는 내 눈엔 안개로 보이지만, 산 아래에서는 산꼭대기에 구름이 걸린 것으로 보일 거다. 예전에 지리산에서 만났던 것처럼 앞이 안 보일 정도의 구름은 아닌데,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이라 참 새롭다.

접치삼거리에서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

장군봉으로 가는 길은 걷기 좋은 완만한 능선길이다. 이런 능선길 걷는 맛에 조계산을 찾는다.

조계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안타깝게도 조계산의 풍경은 별로 임팩트가 없다. 적당히 높고 너른 산이라 걷기엔 참 좋은데.

구름이 걸린 조계산 정상부

아침까지 비가 내렸던 날씨 탓에 산 정상부에 저렇게 구름이 걸려 있다.

조계산 장군봉 표지석

인증샷을 남기고 굴목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어쩌면 이 구간도 예전에 장박골 정상부를 가는 길처럼 걷기 좋은 능선길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고~

반은 꽝이다. 장군봉에서 작은 굴목재까지 가는 길은 주야장천 내리막이었다. 뒤덮인 낙엽 탓에 어딜 디뎌야 할지도 애매한 내리막 ㅎㅎ

내려온 길을 뒤돌아봤다.

장안천

작은 굴목재에 벤치가 보이길래 배낭을 벗고 잠깐 쉬었다.
여기서 잠깐 고민. 직진으로 송광굴목재로 내려갈까, 샛길로 빠져서 장안천 방향으로 내려갈까...

내려왔던 길의 상태로 봤을 때, 송광굴목재로 향하는 길은 걷기 좋은 능선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결국 장안천 방향으로 계획을 급수정했다.

장안천 부근 등산로

성공 ㅎㅎ 조금 짧긴 하나 여기 등산로도 제법 맘에 든다.

장안천 등산로

개천과 나란히 가는 등산로가 제법 좋았다.

장안천

아침까지 드문 드문 내린 비 덕인지, 산 중턱의 계곡인데도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릴 정도로 수량이 제법 많다. 어디로 내려갈까 제법 고민했는데, 성공했다. ㅎㅎ

장박1교

장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몇 개 있는데, 그 이름이 전부 장박교인 걸로 봐선 이 골짜기가 장박골인가 보다.

천자암

보리밥집과 배도사 대피소를 지나 천자암산으로 빠져야 하는데, 이정표와 길이 매치가 안돼서 잠깐 고민했다. "저기 어디에 길이 있단 말인가?" 수북이 쌓인 낙엽 탓에 도무지 길처럼 보이지 않아서 잠깐 고민.

한참 훑어보니 길의 윤곽이 살짝 보인다. 긴가민가 싶은 맘에 올라가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자암산 능선길

천자암산에서 운구재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이 그렇게 좋다. 내가 조계산에 오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데, 특히 오후의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걷는 이 길은 정말 일품이다.

이끼로 뒤덮힌 바위들

마치 원시림처럼 바위 위로 이끼가 가득 앉았다. 겨울엔 이 길에 쌓인 눈이 늦게까지 안 녹던데, 아마 햇볕이 잘 안 드는 음지라서 그런가 보다.

천자암산 능선길
천자암산 능선길

눈에 익은 이 길을 보니 천자암이 바로 코 앞이다.

천자암 입구

흰색 건물은 화장실이고 ㅎㅎ 그 뒤편이 쌍향수로 유명한 천자암. 화장실을 보자마자 아침 내내 해결하지 못한 변의를 약간 느꼈으나 조용한 산사에 민폐가 아닐까 싶어 그냥 패스 했다 ㅎㅎㅎ

천자암 은행나무

커다란 은행나무는 이미 잎사귀를 다 떨구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천자암 부근 등산로

신나서 걷는데 집중하느라고 천자암산 능선길은 사진이 별로 없다. 하여간 이 길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산 코스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다.

문득, 다음엔 송광사를 기점, 종점으로 삼아서 천자암산만 한 바퀴 돌아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왜 여태 이 코스는 생각을 못해봤을까.

송광사

정찰 중인 매

멀리 하늘 위로 선회비행을 하는 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을 찍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아래로 내리꽂는 걸 보니 사냥감을 포착한 모양이다. 사냥에 성공했으려나...

송광사 뒤편

송광사 뒤편을 보니 길었던 산행이 거의 끝나간다.

막바지 단풍

이렇게 산행 중간중간 늦게까지 남은 단풍들이 소소한 눈요기 거리가 되었다. 타이밍을 못 맞춘 게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