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동안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간만에 뒹굴뒹굴을 할까, 밀린 영화를 차례로 볼까 했는데, 다행히 이틀은 비 소식이 사라졌다. 그래서, 오랜만에 산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딜 갈까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가보고 싶었던 길의 윤곽이 떠올랐다.
" 금강암 뒷길: 금강암 → 전망대 → 낙안민속자연휴양림 "
낙안 금전산은 세 번째 산행인데, 첫 번째는 불재에서 돌탑봉을 넘어서 금전산에 올랐다가 낙안온천 방향으로 내려왔었고, 두 번째는 낙안민속자연휴양림에서 올랐다가 정상을 찍고 성북마을로 하산했었다. 매번 코스가 다르다 보니 이 작은 산이 아직까진 매번 새롭다.
지난번엔 이 길로 내려왔었는데, 이번엔 반대로 올라가는 터라 풍경이 참 낯설다. 낯선 풍경에 여기저기 눈길을 주다 보니 돌담도 기억나고 모퉁이의 나지막한 지붕도 기억났다. 옛날 외갓집 풍경 같아서 이 동네가 더 정겹게 다가온다.
동네 골목길을 지나 큰 고목 뒤쪽의 작은 배수지 물탱크를 지나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묵은 길이 변수
통행이 많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관리가 부족한 탓인지, 섬유질 매트를 깔아놨던 이 길은 완전히 묵어 버렸다. 못 뚫고 나갈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뚫고 나갔는데, 바지에 풀씨가 한가득 묻었다. 묻었다라기 보다는 꽂혔다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겠지 ㅎㅎ
아까 초입의 고목이 보이 전에 갈림길이 하나 있는데, 거기도 등산로로 연결되니 혹시 여길 가보실 분들은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자세한 코스는 오픈스트릿맵에 올려놓았으니 해당 지도 참고.)
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잔뜩 묻은 풀씨도 털어내고, 행동식으로 샀던 사탕도 주머니에 채워 정리하고 출발했다.
예전에 반대로 내려올 때도 등산로 상태가 썩 좋다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지금도 그때랑 상태는 비슷하다. 적당히 미끄럽고 적당히 헷갈리게 낙엽 덮인 길을 오르다 보니 지루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ㅎㅎ
낙안온천 방향의 길과 합류하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성북마을에서 올라오는 길도 제법 경사가 있는데, 사실 이 구간은 몸풀기 정도.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정말 동네 뒷산 치고는 만만치 않게 힘들다.
삼거리부터 금전산 정상까지 고작 800미터라는 저 거리는 잊으시라. 숨이 턱까지 차오름을 몇 번 느끼다 보면 정상에 도착한다. 가끔은 힘든 마음에 욕도 나온다 ㅎㅎ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산의 높이와 올라갈 때의 고됨은 아무 상관 없다. 그저 길이 어떻게 놓였느냐, 산세가 얼마나 험악하냐에 따라 동네 뒷산 같은 이런 산이 욕 나오게 힘들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높이의 산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기도 한다.
금전산은 오공재 방향만 제외하고는 다 올라본 거 같은데, 어디를 들머리로 삼든지 모두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그 중 으뜸을 꼽으라면 불재에서 돌탑봉을 넘어서 금전산에 오르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성북마을에서 오르는 것이 두 번째로 힘들지 않나 싶다.
기암절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뒷산 같은 이 작은 산이 보여주는 풍경은 정말 매력적이다.
금전산은 이런 기암괴석을 보는 재미와 산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즐기는 재미가 남다르다.
비밀의 길
매우 비밀스러운 이 길을 지나야 금강암에 도착하는데, 처음 여기로 내려올 때, 길을 못 찾아서 잠깐 멘붕이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ㅎㅎ
난간은 몇 개 보이는데, 한눈에 방향 정리가 안 되는 꽤 비밀스러운 길이다.
왜 그러냐면 길이 동굴처럼 바위 아래를 지나기 때문이다. 처음 이 길로 하산할 때, 길을 못 찾고 낭떠러지로 갔었다. 순간 몰려온 멘붕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ㅎㅎㅎ
고생보상
금강암에 오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이 정도 풍경이면 오를만하지 않은가?
금강암의 훌륭한 풍경에 한숨 돌리자. 이 코스의 오르막은 막바지가 압권인데, 아직 그게 끝나지 않았다. ㅎㅎ 금강암을 지나서 금전산 정상까지가 거리 상으로는 진짜 코 앞인데, 길이 너무 비탈져서 꽤 힘들다.
금전산 정상부
오래간만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경험을 몇 번하고 나서야 금전산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근데, 표지석 위치가 바뀐 거 같다. 지난번엔 조금 옆에 있었는데...
정상에서 간식 좀 먹고 주변을 둘러보다 놀라운 걸 발견했다.
바다가 보이네?
엊그제 비가 조금 내린 덕분인지, 멀리멀리 저게 뭔가 싶었는데, 바다가 보인다.
카메라 줌을 더 당겨보니 올망졸망한 섬들이 널려 있는 게 분명히 여자만 풍경이다.
내가 혹시 저 풍경을 놓쳤었나 싶어서 지난 산행에서 찍었던 사진을 다시 찾아보니, 바다가 보이는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때의 시계는 낙안면 일대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여자만의 저 섬들 뒤편은 분명 여수일 테고, 하여간 이렇게 멀리까지 보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하산
정상을 찍고 다시 금강암 방향으로 내려오면 금강암 뒤편에 마치 샘터처럼 생긴 산신각이 하나 있는데, 거길 지나면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산 능선을 따라가는 길을 워낙 좋아하는데, 이 길도 언제 한번 가봐야지 생각했다가 이번에 오게 됐다.
금전산의 능선길을 걷다 보면 이런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못 보고 갔으면 아쉬웠을 풍경이다. 동네 뒷산 같은 이 작은 산이 어쩜 이렇게 멋질까 싶다.
능선길의 상태는 대체로 이렇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오솔길인데, 통행이 많지 않은 탓에 길이 조금 묵었다. 겨울인 지금은 그나마 길의 윤곽이라도 또렷이 보이는데, 풀이 많이 자라는 시기엔 누군가 따로 등산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정말 애먹을 만한 길로 보인다.
능선길을 걷다 보면 예전에 안내도에선가 본 거 같은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전망대에서 보는 낙안면 풍경이 완성판이지 않나 싶다. 낙안휴양림 방향으로 하산하지 않더라도 전망대까지는 정말 와볼 만하다.
사진 실컷 찍고 내려가는 길은 약간 조마조마하다. 길이 조금 묵은 편이라 헤매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함이 약간. 다행히 헤매지 않고 내려오긴 했는데, 길이 조금 비탈지다. 이 산은 어딜 가나 그렇지만...
통행이 많지 않은 길이라 낙엽에 길 윤곽이 잘 안 보이는 곳이 제법 있다. 그렇게 긴가민가 싶은 순간에 저런 리본이 보이면 어찌나 반가운지 ㅎㅎ
비탈진 길을 꾸역꾸역 내려오다 보니 멀리 휴양림 건물이 보인다. 이제 반쯤 내려왔나 싶은 순간.
하산길 곳곳에 붙잡고 오르내릴 수 있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줄이 삭아서 손에 분진이 묻어난다는 단점도 있긴 하나, 이거 없었으면 어떻게 내려갔을까 싶을 정도로 비탈진 곳이라 그저 감사할 뿐.
하산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 뭔가에 잡아먹힌 새털이 보였다.
오직 깃털만 남아서 그날의 사건을 말해주는 듯하다. 멧비둘기 털인가 싶기도 하고, 직박구리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빈듯한 산속에서도 누군가의 시간은 바삐 가고 있구나.
산행종료
급수시설이 보이면 등산로는 곧 끝나고, 자연휴양림 뒤편으로 연결된다. 휴양림에 다다르니 길 앞으로 무슨 표지판이 보인다. 뭔가 싶어 유심히 보니, 출입금지 킁 ㅎㅎㅎ
등산로를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려면 금강암이나 전망대부터 차단해야 맞을 것 같은데, 거긴 그런 안내판이나 차단시설이 전혀 없었다. 아마 휴양림에 놀러 온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놓은 듯하다.
휴양림을 내려와서 출발지로 복귀하려면 큰 도로(지방도)를 잠깐 걸어야 하는데, 인도는 커녕 갓길도 없어서 걷기가 조금 찝찝하긴 하다.
다음을 기약하며 금전산의 세 번째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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