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봉을 다녀온 지 한 달 가까이 흐른 시점에 미뤄둔 후기를 써본다. 감흥이 가시기 전에 바로 글로 옮겨야 하는데, 너무 바쁘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지리산허브밸리 주차장
바래봉은 자주 오는, 내가 애정하는 산행지 가운데 하나다. 너무 힘든 산행은 싫은데, 어딘가 나가고 싶을 때. 아름다운 지리산 능선길이 몹시 그리울 때. 그럴 때 찾는 곳이 바래봉 아닌가 싶다.
지리산허브밸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산덕임도를 따라 부운치에 올랐다가 팔랑치를 거쳐 바래봉 정상에 오르는 코스다. 예전부터 겨울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그 소원 드디어 풀었다. 약 14km 거리에 6시간 정도 소요됐다.
올라갈 바래봉 부근을 바라보니 안개가 뿌옇다. 오늘 어쩌면 상고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살짝 했으나,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저건 안개가 아니라 미세먼지였다. 내려오는 길에 날씨가 뭔가 수상하여 기상정보를 찾아보니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이더라.
출발
인가 근처의 도로는 제설제를 뿌려서 아주 말끔한 상태인데, 집 몇 채를 지나고 나니, 곧 두껍게 쌓인 눈이 반겨주었다.
아이젠에 스패츠까지 착용했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나다녔는지, 눈길이 제법 단단하게 다져진 상태였다. 굳이 스패츠까진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평소 눈 구경하기 힘든 곳에 산다. "뽀드득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에 집중하니 잡생각이 사라진다. 이거 참 신세계일세.
달력사진으로나 봤을 법한 눈 덮인 계곡도 신기했고.
무수히 찍힌 발자국을 보니, 나와 같은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산덕임도에서 부운치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너무 오랜만의 산행이라 그런지 다리가 제법 아프다. 운동부족과 더불어 미끄러운 눈길 탓에 더 힘든 것도 있는 듯하다.
엉덩이 붙이고 잠깐 앉고 싶어서 근처 바위를 둘러보니, 널찍한 바위마다 담비들이 배설물로 영역표시를 야무지게 해 놓았다. 바위 하나는 남겨놓을 것이지... 고얀 놈들.
족제비과 동물들은 바위에 저렇게 영역표시를 하는 습관이 있다. 담비, 족제비, 수달 등. 저 배설물 크기로 담비가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부운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운치
평소 잘 보지 못하는 풍경이라, 나뭇잎도 없는 앙상한 가지에 저렇게 눈이 쌓이는 게 참 신기하다.
눈 구경 실컷하며 부운치 삼거리 근처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내내 간만에 보는 눈길이 어찌나 즐거운지.
팔랑치와 부운치 방향으로 나눠지는 부운치 삼거리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눈구경과 경치구경은 이제부터다.
팔랑치
가끔 지리산 능선길을 걸을 때, 이곳의 눈 쌓인 풍경이 늘 궁금했었다. 오늘 드디어 그 소원을 푸는구나.
눈 덮인 팔랑치는 더없이 아름답다. 그 모양을 알 수 있을 만큼, 딱 적당히 눈이 쌓였다.
산 아래에서는 쌓인 눈이 얼마 없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길 바깥으로는 50cm 넘게 쌓인 곳도 많았는데, 탐방로 전구간은 앞서 지나갔던 사람이 워낙 많은 덕에 발이 빠지지 않을 만큼 잘 다져져 있었다.
겨울 눈길 산행은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 큰 즐거움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거 정말 신세계다.
미세먼지 탓에 가장 먼 천왕봉은 아주 희미하게 윤곽만 볼 수 있었다.
이거 보자마자 빵 터졌다. 얼마나 즐거우셨을까 ㅎㅎ
몇 번 걸어본 길이라, 이 구간이 아름답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설경까지 더해지니 정말 다른 세상 같다.
바래봉
팔랑치를 지나 바래봉 가는 길과 합류하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늘 어떨까 상상만 했던 겨울 풍경이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다.
길 위로 까마귀 떼가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만들며 앉아 있다. 똥 맞을까 봐 지나가기가 두렵다.
바래봉에 도착하니 사람이 제법 많다. 산덕임도 쪽으로 올라올 때는 서너 명 본 듯한데, 아무래도 산덕임도 방향이 덜 알려지긴 했나 보다.
하산
올라오면서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허기가 상당하다. 그래서, 바래봉 인증샷 몇 장 남기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힘들게 싸 짊어지고 온 컵라면을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평소 무거워서 보온병은 절대 안 가지고 다니는데, 이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보온병과 컵라면을 챙겨 왔다.
산덕임도에서 올라왔으니, 하산은 반대방향인 정규 탐방로 방향으로 잡았다.
내려오던 길, 쉼터에서 라면을 맛있게 끓여 먹고 내려가다 보니, 길에 썰매를 타고 내려간 흔적이 굉장히 많다. 재미난 사람들 참 많구나 싶었는데, 아래 현수막을 보고 빵 터졌다.
저런 거까지 막을 필요가 있겠나 싶다가,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배수로에라도 처박히면서 꽤 크게 다치지 싶긴 하다.
운봉읍 근처에 도착하니 앞산 너머로 노을이 진다.
하산 타이밍도 기 막히게 좋았다. 아름다운 낙조 구경하며, 눈 덮인 산야를 즐기며 걷다 보니 산 능선에 해가 걸릴 무렵에 산행이 끝났다.
겨울 산행을 맛보고 나니, 안 그래도 애정하던 바래봉을 더 크게 애정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 내린 후에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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