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지산이 초봄 산행 코스로 적당해 보여서 원래 계획했던 곳을 제쳐두고 급하게 마음을 바꾸었다.
원래 계획했던 코스는 삼도봉을 찍고, 석기봉을 지나 민주지산 정상을 찍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이 코스가 대략 14km에 6~7시간 정도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악천후(?)를 만나, 준비부실을 탓하며 삼도봉만 겨우 찍고 하산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날 산행의 총거리는 11km 남짓이고, 소요시간은 5시간.
설산
출발지로 삼은 물한계곡 주차장(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1112번지)에 가까워지니눈 덮힌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불길한 예감은 거기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최근 낮기온이 10도 이상 올랐던 날이 많아서 산에 눈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에 한라산에서 한번 겪었던 일인데, 그 교훈을 그새 잊었다니 한심하기도 하다.
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일단 계획했던 대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이 즈음 어딜가나 그렇지만 여기도 참 적막하다. 그나마 지저분한 모습은 없어서 참 다행이다.
겨우내 내렸던 눈이 녹아 만들어진 계곡물의 수량이 상당하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마치 여름철 같았다.
정갈하고 아담한 절집을 지나면 출렁다리로 탐방로와 연결된다. 우측에 보이는 관음전 건물 뒤편으로 올라가면 된다.
믿고 싶지 않았던 고난의 예고
이제 시작하는 길인데, 길에 쌓인 눈을 보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게 오늘 고난의 예고편이랄까.
산보하기 좋게 숲길이 너무 잘 만들어져 있다. 가까이 있었다면 분명히 자주 찾았을 그런 곳 아닐까 싶다.
영동군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나 보다. 국립공원 못지않게 훌륭하다.
잣나무숲 삼거리에서 삼도봉 방향으로 길을 잡았고, 원래 목표는 민주지산 이정표 방향으로 내려오려고 했으나, 계획대로 돌진 못했다.
등산로 초입
아직 높이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그늘진 곳은 어김없이 눈이 쌓여 있다. 이 계곡을 건너가도 되고, 물이 많을 때는 멀리 보이는 목교로 우회할 수도 있다.
처음 봤던 목교는 그냥 지나쳤는데, 여긴 계곡 건너편에 눈이 많이 쌓여 있는 게 보여서 목교를 건넜다.
근래 봤던 계곡 중에선 가장 깨끗해 보인다. 그리고, 여기도 용에 얽힌 전설이 많나 보다. 황룡사를 시작으로 해서 폭포이름에도 용이 들어가니.
약속이나 한 듯, 한 장소에 메달아 놓은 산악회 리본이 재밌는 볼거리가 되어준다. 가끔 산에서, 쓸데없이 마구잡이로 매달아 놓은 리본은 참 볼썽사납던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 마치 남산의 자물쇠 마냥 진귀한 풍경이 되어준다.
지나와서 찍은 사진인데, 물이 떨어지는 부분만 쳐다보고선 계곡에서 길이 끊긴 줄 알았다. 당황해서 위쪽을 살펴보니 그제서야 잠기지 않은 징검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주왕산의 그 뼈아픈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았나 보다 ㅎㅎ
저게 전부 잣나무일까? 식물을 잘 몰라서 단언할 수는 없으나, 키 높은 나무 치곤 햇볕이 잘 들어와서 좋았다.
폭포 높이는 그렇게 높진 않았으나, 풍부한 수량 덕에 쏟아지는 소리가 참 시원하다. 이 시기에 이렇게 계곡물이 많을 거라곤 예상을 못했었다.
난코스 시작
어느 정도 올라오니 햇볕이 잘드는 곳도 눈이 안 녹고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사는 곳을 기준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3월의 설경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아이젠도, 스틱도 뭐 하나 챙겨 온 게 없다.
여기서 가야할 방향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멀리서 대충 봐도 아이젠 없이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어쩌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삼도봉까지만 갔다 오자는 생각을 굳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계단이 사라질 무렵부터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고, 거기에 경사까지 가파라지니 오르기 정말 힘들었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허벅지까지 빠지기가 예사다. 부러진 나무가지를 하나 지팡이처럼 집어 들고 찔러보면서 가긴 했는데, 그래도 저렇게 깊숙이 빠지는 곳을 다 피해진 못했다.
삼마골재 부근까지 오니 시야가 트여서 예상치 못했던 3월 설산의 경치를 즐겼다. 신선처럼 즐기고 싶었으나, 여건 때문에 마음이 편치는 않다. ㅎㅎ
진짜 난코스 등장
저 밧줄이 없었다면 애초에 올라갈 생각을 못했을 구간이다. 미끄러워서 정말 답이 안 나왔을 곳인데, 문제는 저 경사에 밧줄이 없는 곳도 섞여 있다. 밧줄 없는 곳은 분명 길이 좋은 구간일 텐데,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길의 윤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길 올라가면서 들었던 생각... "어떻게 내려오나?"
결과를 미리 이야기하자면 본의 아니게 엉덩이로 썰매를 타며 내려왔다. 준비 없이 급하게 맞이한 썰매질이라 정신적인 충격은 다소 있었으나, 육체적인 피해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ㅋㅋㅋ
삼도봉
정말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여태껏 봤던 산정상의 표지석 가운데 가장 위엄이 넘친다. 이 곳을 중심으로 3면이 각각 충청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다. 삼도봉은 지리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도 경계가 나뉘는 지점이 한 군데밖에 없을 리는 없지 않나 ㅎㅎ 그래서, 이 곳이 내가 밟아본 두 번째 삼도봉이 되었다.
금릉군이 어디지 싶었는데, 지금은 김천시로 통합되었단다.
삼도봉 주변경치도 훌륭한데, 여건 상 석기봉으로 갈 수 없어서 정말 아쉬웠다. 석기봉 구간은 난이도가 더 높다고 들은 바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깨끗하게 생각을 접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될 일.
석기봉까지 가지 못해서 정말 아쉽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땐 꼭 석기봉 산신령님을 뵙고 오겠다. ㅎㅎ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인데, 여기서도 애정하는 가야산이 보인다. 올해 저길 다시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야산 만물상코스가 눈에 아른거려서 혼났다.
하산
하산길은 예상대로 험난했다. 아이젠 없이 내려오려니 극기훈련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자짓 미끄러질까 신경 쓰다 보니 사진 찍을 여유도 없이 내려오는 길에만 집중했다. 다친 곳 없이 내려와서 다행이었고, 한편으론 준비가 부족했던 성급함도 탓해 본다.
어느 해 3월, 한라산 빙판길에서 그 고생했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자책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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