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제주 한라산 (성판악 → 백록담) 등반

epician 2019. 3. 18. 00:23

계획에 없던 한라산 백록담 보러 고고씽~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하기로 했었는데, 행선지가 몇 번 바뀌고 나서 제주도로 정해졌다. 그 가운데, 하루는 한라산을 보고 오자고 했었다. 일행 중에 한 분이 평소 등산을 하지 않는 분이라, 가장 만만한 영실 코스로 가볍게 갔다오면 어떨까 싶었다.

헌데, 내 예상을 깨고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오르는 코스를 가는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난 그저 덥썩 물었다. 콜~~ ㅎㅎ

성판악 → 백록담

경로

코스는 성판악에서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까지 오르는 경로이고, 대략 20KM의 거리다. (스크린샷은 18KM로 나오는데, 저건 프로그램의 코스 단순화 과정을 거친 탓에 거리가 약간 줄어들었다.)

8시 30분 무렵 성판악에 도착했을 때는 기온이 0도 부근으로 무척 쌀쌀했다. 여행 일정을 잡을 때만 해도 영상의 포근한 날씨를 기대했는데, 꽃샘추위가 끼어든 탓에 기온이 급락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기 좋은 등산로

정상부 아래에 위치한 진달래밭 대피소까진 무척 편한 길이 계속 됐다. 그 이후는 경사가 좀 급해지긴 하는데, 이 산, 저 산 많이 다녔던 분들이라면 전혀 어렵지 않게 오를 만한 경사도였다. 전반적으로 오르막 난이도는 아주 약한 편.

굵은 화산암 깔린 등산로잘 정돈된 등산로 (화산암 바닥)

깔개와 고임목으로 정리된 등산로초반 등산로 상태

목재 다리가 놓인 등산로초반 등산로 상태

한라산의 전체적인 등산로 상태는 다 좋았지만, 특히 초반은 이보다 더 좋게 만들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정돈이 너무 잘되어 있다. 마치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까마귀

민가 근처엔 까치가 흔하고, 산엔 까마귀가 흔한데 한라산에도 어김 없이 까마귀가 보였다. 여기 사는 녀석들은 몸집이 조금 작은 편이다. 보통은 큰까마귀가 많이 보이는데, 이 녀석들은 덩치가 한참은 더 작다. 아무래도 다른 종인듯 하다.

등산로를 열심히 걷던 중 모자 위로 뭔가가 툭 떨어진다.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진 줄 알고 손으로 툭 치웠더니, 장갑에 묻어나는게 물이 아니라 똥이다. ㅠ.ㅠ 이 망할!!

모자 챙에 떨어진 까마귀 배설물까마귀 똥을 맞은 모자 챙

물티슈에 건티슈에 온갖걸 동원해서 급히 수습했으나, 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결국, 이 모자는 여행 내내 못쓰고 베낭에 메달고만 다녔다는 슬픈 전설이...

등산로 풍경

숲을 관통하는 길이 대부분이라 산 바깥으론 시야가 뻗질 못한다. 볼 게 없다고 해서 서운치는 않았다. 울창한 원시림에 가까운 한라산에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등산로 양 옆으로 가득 채운 조릿대 군락한라산 등산로 풍경

높은 나무 꼭대기에 겨우살이가 기생하는 모습겨우살이

높다란 나무 꼭대기에 겨우살이가 기생하는게 보였다. 국립공원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진작에 채취해 갔을텐데 ㅎㅎ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진 등산로나무 계단의 등산로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한 모양새다. 전체적인 등산로 상태는 정말 좋았다.

진달래밭 대피소

건물 지붕이 살짝 보이는 진달래밭 대피소진달래밭 대피소

백록담으로 향하기 전에 쉴 수 있는 마지막 대피소다. 무인 대피소이고, 매점 기능은 없다. 이 날 바람이 무척 거세게 불었는데, 그 칼바람을 피해서 들어온 등산객으로 대피소 내부는 만석이었다.

진달래밭 대피소 부근

진달래밭 대피소 부근에서 진달래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 근방은 조릿대만 가득해 보였다.

난코스 등장 (아이젠 없는 자의 슬픔)

떠나기 전에 기온을 쭈욱 확인해보니 정상부를 제외하곤 거의 영상의 기온이라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탓에 내려오다가 정말 제대로 미끄러졌다 ㅠ.ㅠ 그 덕에 높은 고산은 4월까진 아이젠 꼭 챙겨다여야겠다는 교훈을 하나 얻긴 했다.

얼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등산로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자 마자, 눈과 얼음이 등산로 옆으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얼음으로 반쯤 뒤덮힌 등산로

올라갈 수록 얼음이 뒤덮히는 폭이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얼음으로 반 이상 뒤덮힌 등산로

갈수록 빙판의 폭이 넓어졌다. 이런 상태를 끝으로, 더 올라갈 수록 아예 빙판에 가까운 길이 한참이나 계속됐다. 빙판 가운데 밟을 만한 조그만 돌뿌리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한 곳은 등산로 옆의 나뭇가지를 붙잡고, 누군가 이미 밟고 지나간 길 옆의 조릿대를 밟으며 힘들게 올라갔다.

몰아치는 칼바람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지니 대략 15~20m/s에 가까운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라산의 이 강풍은 정말 평생 못잊을거 같다. ㅎㅎ

고사목 너머로 보이는 산 아래 풍경한라산 정상부에서 내려다 본 풍경

고사목 군락

고산지대의 거친 기후 탓에 곳곳에 고사목들이 많이 보였다. 예전에 지리산에서 봤던 고사목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한라산 정상부한라산 정상부

저 둥근 봉우리가 한라산 정상이다. 큰 나무가 거의 없는 탓에 정상부가 또렷하게 보였다.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 본 풍경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길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계단의 경사도 보다는 날아갈 듯 불어대는 강풍이 더 힘들었다. 꽁꽁 싸매도 자켓 사이를 파고드는 칼바람 탓에 춥기도 몹시 추웠다. 어쩔 수 없이, 귀찮아서 꺼내입기 싫었던 다운 베스트를 베낭에서 꺼내어 껴입었다.

그래도, 얼굴을 때려대는 저 칼바람은 피할 길이 없었다.

한라산 정상부 계단길

한라산 정상, 백록담

해발 1,900m 이정표

해발 1,900m 이정표. 가만 서 있기 조차 힘든 바람을 맞으며 힘들게 남긴 사진이다. 이제 곧 백록담을 본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 있어야 정상이겠으나, 세찬 칼바람에 시달리다보니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눈과 얼음이 남아 있는 3월의 백록담백록담!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백록담을 오래 구경하기 어려웠다. 동영상을 남기려고 했으나 영하의 기온 탓에 배터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배터리를 갈아끼워도 배터리 부족 경고가 뜨길래 1분쯤 촬영하고 포기했다.

강한 바람 탓에 고드름 조차도 저렇게 희안한 모습으로 달렸다.

등산로 로프에 달린 고드름

하산

올라갔던 길과 내려오는 길이 같은 터라 특별히 사진을 더 남기진 않았다.

사실.. 빙판길 중간 중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며 내려오다보니 사진찍을 틈이 없었다. 그러다, 제대로 한번 미끄러져서 멘탈이 반쯤은 나갔었고 ㅎㅎ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삼나무 숲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는 한라산 등산로

슬슬 다리가 피곤해질 무렵, 거칠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고 머리 위로 초봄의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정말 그간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씻겨 나간다.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보니 끝날 것 같지 않던 산행의 끝을 알리는 성판악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

성판악 휴게소

우연찮은 기회에 준비 없는 맞이한 한라산 산행이었지만, 나름 알차게 구경하고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도 모두 벗어놓고 왔다. 아무래도 첫 한라산 산행이 너무 좋았던 터라, 앞으로 잊을만하면 한번씩 한라산으로 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