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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 봄소식 가득한 해남 달마고도 트레킹 1/2
달마고도 3구간 막바지 (Feat. 구렁이)
무릉도원 어쩌고 하면서 잘 쉬었다가 다시 걷는데, 1미터도 안 되는 코 앞에서 이 녀석과 마주쳤다. 얼마나 놀랬는지,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 녀석이 코 앞에 다가갈 때까지 신호를 안 줬거나, 내가 못 들었거나... ㅠ.ㅠ
이 녀석도 아주 가느라단 어린 개체였는데, 산에서 구렁이는 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담에는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신호 좀 다오 ㅎㅎ
구렁이에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계속 걸었다.
원래 길이 없던 곳 같은데, 이렇게 돌을 쌓아서 예쁜 비탈길을 만들어 놨다. 하나하나 포개진 바위를 보니 그분들 고생은 말해 뭣하겠는가 싶을 정도다.
이 나무도 성격이 급해서 꽃 먼저 피우는 부류인가 보다.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봉우리가 한가득이다.
이런 절경들을 놓칠 새라 사진 찍느라 지체하다 보니 예상했던 6시간 안에 절대 못 들어간다는 결론이 아주 쉽게 나온다. 경과한 시간과 남은 거리를 대충 계산해보니 7시간 이상 걸리겠고,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면 다행이지 싶다.
하여, 원래 계획했던 도솔암 왕복은 취소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도솔암도 그렇게 절경이라고 하던데, 여긴 다음에 등산코스와 묶어서 다시 한번 와야겠다.
달마고도 4구간
달마산의 남쪽 끝 자락이 지도상엔 연포산이라고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남쪽 끝자락 연포산 능선을 돌아서면 달마고도 4구간이 시작되는데, 도저히 6시간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거 같던 예상시간의 비밀이 여기서 풀렸다.
그간 운동을 너무 오래 쉬어서 내가 평균 이하가 됐구나 싶었는데 ㅎㅎ 2~3구간에 비하면 4구간이 길이 편하다. 2~3구간에서 떨어졌던 보행속도를 4구간에서 많이 만회할 수 있다.
키 작은 나무 사이로 새로 만들어 놓은 평탄한 길을 지나면 너른 임도로 이어진다.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전체 구간을 통틀어서 가장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보는 풍경도 정말 예사롭지 않다. 주름처럼 접힌 산줄기 너머로 시름 하나 없을 거 같은 세상이 내려다 보인다.
걷다 보니 길 옆으로 제설함 같은 게 보이는데...
빈 페트병이 저기 왜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버려놓고 간 건가? 저런 거 하나 들고 다닐 기운도 없으면 집에서, 병원에서 편히 누워 쉬어야지 뭣하러 산에 오나 싶은 생각이 든다.
4구간에서도 산 아래쪽으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데, 아마 저 작은 섬 너머 멀리 진도가 있을 거다. 바다에 석양이 비추는 걸 보니 곧 해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산에서 해 떨어지는 경험을 몇 번 해봤더니 썩 자주 하고 싶진 않더라 ㅎㅎ
머리 위로 달이 떠 있는 게 보여서 카메라를 꺼냈더니 그 순간, 옆으로 비행기가 날아간다. 타이밍 참 절묘하구나 싶었는데, 여기서 비행기를 꽤 많이 봤다. 아마 광주나 무안공항을 오가는 여객기들인가 보다.
급한 마음에 카메라는 봉인하고 후다닥 걷고 싶었으나, 눈길 닿는 곳마다 놓치고 갈 수 없는 풍경이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꺼내드니, 몇 분 사이에 맹금류 한 마리가 선회하는 게 보인다.
정말 운 좋게 합성이라고 의심할 만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찍었지만, 정말 거짓말 같은 광경이다 ㅎㅎ
찍고 나서 찾아보니 말똥가리다. 붉은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저게 그 끼약~~ 하는 살벌한 샤우팅을 하는 맹금류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근원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말똥(말의 배설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다. 그랬구나~~
그래서, 몇 시간 걸렸을까?
안내도에는 4구간 완주하는데 6시간 30분 정도라고 나왔었는데, 그나마 4구간을 바삐 걸어서 6시간 15분 만에 들어왔다. 사진 찍느라고, 경치 구경하느라고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다. 아마 도솔암 보러 간다고 올라갔다 왔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못 들어왔지 싶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 즐기려면 7시간 이상을 계획할 것을 추천한다.
길었던 17KM의 달마고도가 미황사로 돌아오며 끝이 났다.
어느 곳이던 걷다보면 뭔가 비우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달마고도에선 비움보다는 얻음이 더 컸던 거 같다. 나만 아는 무릉도원 같은 장소를 얻었고, 보지 못했더라면 원통했을 풍경을 얻었고, 이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를 얻었다.
자연스레 다음을 기약하며 첫 달마고도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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