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조상님 뵐 뻔한" 지리산 천왕봉 산행 - 중산리(장터목) 코스

epician 2022. 6. 13. 19:48

지리산 천왕봉을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계속 어긋났다. 작년엔 꼭 가야지 싶었는데, 날 잡고 나면 비 오고, 다시 날 잡고 나면 바쁜 일이 생겨서 시간을 못 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잊혔다가, 최근에 지리산으로 산행을 자주 다니면서 다시금 천왕봉에 대한 미련이 싹텄다.

친한 형님과 이야기 중에 천왕봉 얘기가 나왔는데, 갈 거면 장마 오기 전에 얼른 갔다 오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장마철이네...

산행경로

약 14km, 9시간 소요

중산리 주차장을 출발하여 칼바위 삼거리,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법계사, 중산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약 14km, 9시간 소요됐다. 참고로 국립공원 홈페이지에는 이 코스를 1박 2일 기준으로 12.4km에 9시간 소요되는 것으로 소개해두고 있다. 다녀온 기록과 비교해보면 국립공원의 소개 내용과 얼추 비슷한데, 당일치기라 난이도는 극상으로 올라간다.

보통, 중산리 코스는 칼바위를 중심으로 법계사로 올라가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많이 도는 것 같았으나, 사람 많은 걸 피하고 싶어서 반대방향인 장터목 방향으로 돌았다. 이 방향이 예상대로 사람은 적었으나, 장터목을 목전에 두고서 어찌나 힘들던지 "이래서 사람들이 반대방향으로는 잘 오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출발

중산리 주차장

평일에도 늦으면 주차장이 꽉 찬다는 얘길 들어서 걱정했으나, 단풍철이 아닌 덕인지 금요일 오전 8시 무렵에도 주차장에 빈자리는 많았다. 지하 쪽은 거의 비어있었다.

이곳에서 순두류(경상남도 환경교육원)까지 올라가는 셔틀버스가 있는데, 풀코스가 무리이겠다 싶은 분들은 버스를 이용하여 법계사 쪽으로 오르는 편이 낫다. 버스요금은 2,000원이고 현금만 가능하다고 한다.

탐방로 초입

어느새 짙어진 녹음에 또 한 계절이 성큼 다가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들뜬 기분에 발걸음이 가볍다.

통천길 입구

저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등산로 초반

관리하는 분들의 노고가 깃든 덕에 국립공원은 어딜 가나 등산로 정비상태는 최상이다.

지리산 계곡

이 코스를 따라 장터목까지 오르는 길은 계곡을 옆에 두고 이어진다. 덕분에 거의 끝까지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었다. 바위 하나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두 거쳐오며 쌓이고 쌓인 물소리가 정말 장엄했다.

이상한 자국

탐방로에 자리한 나무에서 이상한 자국을 발견했다. 반달곰의 스크래치 자국인가 싶다. 억지로 맞춰보니 발톱 10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발톱자국이 깊지 않은 걸로 봐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호랑이는 나무에 발톱을 가는 행동을 하는 걸로 아는데, 곰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칼바위

칼바위
칼바위

생긴 모양새가 칼처럼 바짝 솟아있다. 여기까진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경사도 낮은 길이었으나, 칼바위(칼바위 삼거리)를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치솟기 시작한다. 저 바위의 각도가 앞으로 나올 길의 경사를 예고하는 이정표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ㅎㅎ

출렁다리

둥실둥실 이상한 느낌의 출렁다리도 몇 개 건너야 한다. 저런 다리를 건너오면 땅을 밟았을 때도 울렁거리는 듯한 재미난 경험을 한다.

지리산 계곡 하류

산이 높은 덕에 계곡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탐방로
가파른 경사의 탐방로
가파른 경사의 탐방로

중간중간 이런 가파른 경사의 탐방로도 있긴 하나, 본격적인 오르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ㅎㅎ

지리산 계곡

지리산 계곡에도 녹음이 깃들어 물빛깔마저도 너무 곱다.

중간 아닌 중간 지점

중간지점 이정표

중산리로부터 2.6km, 장터목대피소까지 2.7km 남았으니 여기가 거리상으론 장터목까지의 중간 지점쯤 된다. 여기 도착했을 때가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 무렵이다. 거리로만 따지면 여기서부터 장터목까지도 1시간 30분 정도가 더 소요되어야 맞겠지만, 2시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장터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탐방로의 경사가 치솟는다.

탐방로

터널 같은 숲길을 지나는 내내 하늘을 볼 수 없었는데, 별안간 하늘이 보여서 뭔가 했다. 벌써 산 능선이 나올리는 없는데.

계곡 범람부를 지나는 탐방로

계곡 옆으로 너른 땅에 바위가 가득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범람하는 범람부인 듯하다.

공원 같은 모습

지나는 사람 손에 하나씩 쌓인 돌이 탑 무더기를 이루니 마치 공원과 같은 모습이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지 못하는 이 부지런함은 우리의 민족성 아닌가 싶다. ㅎㅎ

지리산 능선

이색적인 풍경에 취해 여기 멈춰서 한참을 구경했다. 그 뒤로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 능선이 가까워만 보여 앞으로 일어날 고생길, 고행길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계곡을 건너는 목조다리

탐방로 정비 상태는 정말 최상이었다.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걷는 내내 불편하거나 위험한 구간은 없었다. 그저 나약했던 내 다리가 안타까울 뿐... ㅠ.ㅠ

아름다운 탐방로
앙증맞은 돌탑

처음 저걸 봤을 땐, "저걸 세우며 소원도 빌었겠지? 산신령님도 참 바쁘시겠다" 싶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바람만 맞아도 쓰러질 저런 돌탑이라도 세우며 힘든 산행으로 부서지는 멘탈을 수습했을지도 모르겠다. ㅎㅎ

유암폭포

말안장 같은 큰 바위를 넘어서 떨어지는 저게 유암폭포란다. 높은 곳이라 비가 많이 내린 직후에나 큰 물줄기를 볼 수 있을 듯하다.

아름다운 탐방로

이렇게 아름다운 산길을 걷다 보면 '병기막터교'라는 작은 다리를 지나는데, 여기서부터 장터목까지 약 1km이고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되는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병기막터교

혼신의 힘을 쥐어짠 마지막 1km

장터목으로 향하는 마지막 1km 구간이 힘들다. 또, 그 가운데 마지막 500m는 나약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좌절의 구간이기도 했다. 스틱 없이 내 다리만 믿고 나선 것이 서너 번쯤 후회되었다. "아!! 스틱 챙겨 올 걸 ㅠ.ㅠ"

지리산 계곡

탐방로가 계곡과 인접해 있어서 장터목까지 500미터쯤 남겨둔 지점에서도 시원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 구간

지형상 계단을 만들기 어려운 곳이나, 경사가 지나치게 심한 곳은 저렇게 붙잡고 갈 수 있는 안전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저런 무지막지한 급경사구간이 나오면 안전난간이고 뭐고 간에 반갑지는 않더라. ㅎㅎ

멀리 올려다 보이는 능선

산 능선과 그 뒤편으로 걸린 하늘이 올려다보여 다 왔나 싶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곧 끝나겠지라는 희망고문이 무려 50분쯤 이어졌다. ㅎㅎ

급경사 오르막길
장터목까지 500m 남았다는 이정표

어찌 보면 금방 끝날 것 같은 500m인데, 여기서부터 경사가 더 치솟는다. 마지막 500m는 정말 스스로 작아지고 겸손해지는 시간.

장터목까지 마지막 500m 구간
숲 너머로 멀리 보이는 하늘

숲 너머로 하늘이 올려다 보여 이제 오르막길이 끝나가는구나 싶었지만, 이 살벌한 오르막이 아직 30분쯤 더 남았다. ㅎㅎ

붉은병꽃나무

지난 삼신봉 산행에서 봤던 붉은병꽃나무가 여기에도 피었으나, 아쉽게도 지는 중이라 색이 곱지 못했다.

녹색지옥 같았던 오르막

키 작은 관목이 울타리처럼 자라고 꽃까지 흐드러지게 피웠건만, 어찌나 힘든지 이 아름다운 길이 녹색지옥 같았다. 정말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지는 시간 아니었나 싶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보며

장터목

장터목 안테나

장터목의 저 안테나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드디어 다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장터목 대피소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본 풍경

왼편 아래의 창고 같은 건물이 급수시설인데, 물 보충하기에 아주 좋다.

장터목 대피소

처음 올라와보는 장터목 대피소는 예상보다 시설이 컸다. 코로나가 풀린 덕인지 취사시설도 개방되어 있었고, 테이블마다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피소 뒤로 보이는 언덕이 제석봉으로 오르는 방향이다.

장터목에서 내려다 본 풍경 (백무동 방향)
장터목에서 내려다 본 풍경 (중산리 방향)

산 양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장을 열었다고 해서 이곳 지명이 장터목이란다. 이 높고 높은 산까지 봇짐을 이고 지고 올라왔을 우리 조상님들의 기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제석봉

풍광으로만 따지면 천왕봉보다도 제석봉 부근이 훨씬 좋았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으로 향하는 길

이 풍경 덕에 장터목까지 고생했던 기억이 싹 씻긴다.

제석봉 부근
제석봉 부근
제석봉 부근

높은 고산임을 실감케 하는 고사목이 생경한 풍경을 연출한다.

제석봉 부근
제석봉 부근

정확하진 않지만, 위 사진에서 가운데 가장 높이 보이는 봉우리가 반야봉이고, 그 뒤편이 노고단 아닌가 싶다.

제석봉 이정표
천왕봉

제석봉 정상부 근처에 도착하면 천왕봉이 올려다 보인다.

천왕봉

여기서 보는 천왕봉이 가장 멋지지 않았나 싶다.

걱정되는 가파른 오르막

멋지다는 감탄도 잠시, 천왕봉의 깎아지는 경사면을 보니 저길 또 어떻게 올라가나 싶은 걱정이 앞선다. ㅎㅎ

제석봉에서 본 풍경 (중산리 방향)

좌측 봉우리가 천왕봉이고, 산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 출발지인 중산리다.

제석봉 부근 풍경

천왕봉

제석봉 부근

내내 맑던 날씨가 천왕봉 부근에 도착하니 급변하여 산 반대편 백무동 방향에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천왕봉이 맑은 풍경을 내어주진 않으려나 보다.

통천문

제석봉 부근에서 올려다볼 때, 어찌 올라갈까 싶던 천왕봉의 가파른 경사면이 막상 올라와 보니 계단이 설치된 곳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부근에서부터 종아리 근육에서 움찔움찔 경련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 쥐가 나기 시작하면 운동 마칠 때까지 계속 올라오는터라 걱정이 앞선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계단길
점점 가까이 몰려오는 구름

천왕봉에 거의 도착할 즈음엔 백무동 방향에서 올라오는 구름이 더 가까워진다. 맑은 날씨는 이미 틀린 거 같고, 비 내리지 않기만 바랐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코 앞까지 몰려온 구름
천왕봉 도착

걷고 또 걸어서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 사람 많은 걸 피하려고 반대로 돌았더니 내가 정상에 도착할 무렵쯤엔 4~5명밖에 없었다. 길이 좀 고돼서 그렇지, 예상대로 역방향이 사람 피하기엔 참 좋았다.

천왕봉에 도착하니 예고하던 근육경련이 오른쪽 종아리에서 슬쩍 올라온다. 그나마 금세 풀려서 다행이었는데, 내려가는 길에선 쓰는 근육이 다른 탓인지 더 이상 경련은 올라오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천왕봉 정상석

해발 1,915m 지리산 천왕봉에 도착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자, 내가 올라본 산 중에선 가장 힘든 산이다. 더 높은 한라산은 경사가 완만하며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는데, 중산리에서 오르는 지리산 천왕봉은 정말 힘들었다.

천왕봉 정상석 후면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구름에 쌓여서 조망이 잘 나오지 않아 아쉽긴 하나, 사진으로만 보던 저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니 참 뿌듯하더라. 그렇게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 법계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

천왕봉에서 내려가는 길

천왕봉에서 내려가는 길도 심하게 가파르긴 하다. 그나마 이렇게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일정 보폭으로 페이스 조절하긴 나아 보인다.

고사목 군락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겨울가뭄으로 고사목이 늘고 있다고 하던데, 천왕봉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고사목 군락이 제법 보인다. 살아 있었더라면 더없이 울창했을 숲인데...

거친 노면의 하산길

법계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의 경사도 만만치 않게 가파르다. 가끔 이렇게 정리가 안된 길이 나타나기도 했다.

법계사

법계사 일주문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내려가는 길에 법계사 구경도 했다. 해발 1,400m 대에 위치해 있는데, 사찰로는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법계사 경내의 바위와 삼층석탑

밀어보면 흔들릴 것 같은 거대한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다. 그 뒤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삼층석탑이란다.

법계사 삼층석탑

탑은 소박한데, 오히려 그 아래의 바위가 범상치 않다. 흔치 않은 모습이라 한참을 둘러봤다. 옥의 티라면 예나 지금이나 바위의 저 낙서는 참 꼴불견이다.

로타리 대피소

법계사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 바로 코앞이 로타리 대피소다.

로타리 대피소

여기서 간식도 먹고 화장실도 한번 들를까 했었는데, 화장실에서 풍겨오는 냄새 탓에 아무것도 못했다. 쥐가 들락거리는 재래식 화장실은 너무 오랜만이라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잠깐 쉬었다가 바로 탈출~

아무르장지뱀

로타리 대피소 계단에서 만난 아무르장지뱀인데, 알을 뱄는지 배가 크게 불러 있다. 멈칫 멈칫해서 도망가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겨우 사진 찍을 틈은 내어주었다.

높이 오른 만큼 내려가는 길도 멀다

얼마나 내려왔나 싶어서 GPS를 확인하면 해발고도는 겨우 백미터쯤 줄어 있고, 또 한참 내려왔다고 생각해서 다시 보면 겨우 구십몇미터 줄어 있고 ㅎㅎ 이 짓을 여러 번 반복했다.

내려오는 길에 기이한 바위를 여러 개 봤는데, 이름을 아는 건 망바위 하나밖에  없다.

반으로 쪼개진 듯한 바위
모아이 석상 같은 모양새의 바위
망바위

망바위에 새겨진 어느 잡놈의 낙서가 참 안타깝다.

망바위 낙서
토끼 + 두꺼비?

찬찬히 둘러보니 왼쪽 바위는 심술궂게 생긴 토끼 같고, 오른쪽 바위는 더 심술궂게 생긴 두꺼비 같다.

칼바위 삼거리

끝이 없을 거 같던 하산길이 칼바위 삼거리가 눈에 들어오자 드디어 끝나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30분 정도를 더 내려가면 통천길 입구가 나온다.

통천길 입구

다시 여기서 5분여를 더 내려가면 출발지였던 중산리 주차장이 나오고, 그렇게 이번 산행이 마무리되었다.

보통, 산행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글로 정리할 때가 되면 다음은 어느 코스로 돌아볼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번 산행은 너무 힘들었던 터라 지리산의 다음 산행을 계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최근 3 연속 지리산 산행을 했던 터라 이제 다른 곳을 둘러봐야 할 때도 된 듯하고. 이제 한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면 다시 찾지 않을까 싶다.

무척 힘들었지만, 뭔가 깔끔하게 정리된 듯한 홀가분한 기분도 참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