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시도 실패
한여름이라 가끔 동네 산책하는 것으로 정신건강을 겨우 보존하던 중, 두 달 정도 등산을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운 날씨엔 선선한 고산이 제격이겠다 싶어, 지리산 반야봉을 찍고 오기로 결심했다.
1주일 전, 만반의 준비를 하여 집을 나섰는데, 6일간 세워뒀던 자동차가 시동이 안 걸린다. 풉...
올해가 3년 차이니, 배터리가 나갈 때도 되긴 했다. 긴급출동을 부를까 하다가, 성삼재에서 다시 방전되면 답도 없겠다 싶어서 깔끔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만에 새벽 5시에 일어나는 노력을 했건만..
쉽지 않은 출발
1주일 후, 휴가철에 광복절 연휴까지 겹쳐서 갈까 말까 무척 고민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성삼재-노고단이 사람들로 얼마나 붐빌까 걱정되더라. 더군다나 구례군에서 운행하는 성삼재 노선버스마저 운행 중단한 상태라 성삼재 주차장은 전쟁터이지 않을까 싶었다. 고민 끝에 그나마 사람이 가장 적을 것 같은 연휴 마지막 날인 광복절 8월 15일로 결정했다.
일단 성삼재로 가보고, 복잡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차를 돌려 백무동으로 가서 연하선경을 보고 오겠다는 2안까지 만들었다. ㅎㅎ
5시에 일어나서 전날 챙겨둔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하고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그 사이 자동차 배터리는 교체한 상태라 시동이 안 걸릴 염려는 더 이상 없다. ㅋ
구례에 도착하니 지리산 성삼재 부근에 구름이 걸려 있다. 해 뜨면 걷히겠지 기대했지만...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하니 사방을 둘러싼 구름 탓에 어둡고 습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7시 30분 무렵 도착하니 3주차장에 빈자리가 제법 있다. 1~2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8시 무렵이 되니 3 주차장까지도 꽉 찬다.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해서 배낭을 메려고 보니, 전날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던 오늘치 식량을 안 챙겨 왔다는 사실이 급하게 떠오른다. 정말 왜 이러나 ㅎㅎ 산 아래로 내려가서 밥을 사서 다시 올라오긴 이미 틀렸고, 백무동으로 목적지를 바꾸고 가는 길에 편의점을 들를까, 근처 가까운 곳으로 목적지를 바꿀까 한참 고민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성삼재 휴게소에 있는 이마트24를 들러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샌드위치도 없고 김밥도 없다. 이것저것 식량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다 보니 오뚜기 냉동 볶음밥이 보인다. 그걸 2개 사서 전자레인지로 돌려 녹인 다음에 배낭에 넣었다. 산행 중에 먹어보니 처음엔 푸석푸석한 식감과 밋밋한 맛 때문에 몹시 우울했으나, 배고프니 안 남기고 다 먹어지더라. ㅋㅋ
코스
성삼재 휴게소에서 반야봉을 올랐다가, 삼도봉을 거쳐서 다시 복귀하는데 약 18.7km, 7시간이 소요됐다. 이번엔 노고단은 안 갔고, 대중교통 연계가 힘든 상황이라 원점회귀가 최선이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사진이 별로 볼 게 없는데, 사진은 지난 산행을 참고하시라.
산행시작
금방이라도 덮칠 듯 사방으로 낮은 구름이 가득하다. 노고단 고개를 향해 10여분쯤 오르니 운무가 가득해지기 시작한다.
초반은 기온이 선선해서 견딜만했는데, 몸에 열이 올라 땀이 나기 시작하니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지 않은 곳이 없다. 물에 빠진 느낌 ㅡ.ㅡ;;
습한 날씨 탓인지 거미들도 출근이 늦다. 주인 없는 빈 거미줄만 여러 개 보인다.
노고단 대피소는 무언가 새로 짓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마치 비라도 내렸던 것 마냥 사방이 축축하다. 고산의 선선함을 만끽하고 싶었건만, 이번엔 그런 호사는 없나 보다.
노고단 고개
노고단 고개에 도착하니 이 궂은 날씨에도 탐방객들이 한가득이다. 휴가철에 광복절 연휴까지 겹치니 예상대로 복잡하다.
애초에 노고단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으나, 날씨를 보니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못 본다는 확신이 들어 즐겁게 지나쳤다. ㅋ
노고단 고개를 지나 숲 안쪽으로 들어서니 정말 극강의 습함이 몰려든다.
체감습도는 한 120%쯤 되는 것 같다. 팔목 잔털에도 운무의 습기가 맺힐 정도다.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남짓인데도 이미 온몸이 축축한 느낌.
야생화
걷다 보면 길 옆으로 색색의 야생화가 가득하다. 꽃을 보려고 나선 길은 아니지만, 바삐 가지 못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잔대인지 모싯대인지 둘이 비슷하게 생겨 내 눈으로는 판독 불가다.
운무가 가득해서 마치 망원으로 잡은 듯 흐리게 나온 사진이 많다.
야생화만큼 예쁜 색을 자랑하는 버섯도 여기저기 가득이다.
돼지령 부근
돼지령 부근에 도착하면 고사목 군락이 보이는데, 이 날은 가득한 운무 탓에 그런 풍경조차도 쉽게 볼 수 없었다.
임걸령을 지나니 못 보던 계단이 놓여 있다. 예전엔 이런 계단은 인공적인 듯하여 싫어했는데, 요샌 생각이 바뀌어 그저 고맙다. 가파른 곳은 계단의 일정한 경사 덕에 같은 보폭으로 페이스 조절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노루목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반야봉 삼거리가 나온다. 반야봉 삼거리까지는 혼자 걸어도 꽉 찰 정도로 길이 비좁다.
반야봉 삼거리
반야봉 삼거리에 도착하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반야봉에 오른 등산객이 벗어놓고 간 배낭이 대충 5개쯤 보인다. 이건 나름의 전통인가 보다. ㅎㅎ
예전에 왔을 땐 이 구간이 좁고 비탈져 기어가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계단이 놓여 있다. 오르기 한결 수월하다.
지난번에 봤었던 고사목 군락도 그대로다. 죽어서도 저렇게 오래가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예전에 가파른 철계단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계단은 없어졌고 대부분 방부목 계단으로 다시 만들어져 있다. 오르기는 말할 수 없이 편한데, 돌로 짜 맞추었어 있던 그 예쁜 길이 없어져 버려서 무척 서운하기도 하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건만 세차게 바람이 불던 그 짧은 순간에 파란 하늘이 잠깐 보였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이내 사방에서 몰려든 구름이 주변을 덮는다.
반야봉 정상 부근에선 바람이 거센진 탓에 운무가 흩여졌다 모이길 반복하는데, 이날 산행 중에 가장 볼만한 풍경이지 않았나 싶다.
가득한 운무 탓에 주변 경치는 하나도 안 보이고, 연휴라 등산객이 제법 많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조망대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삼도봉
반야봉을 찍었으니 그냥 돌아갈까 싶다가, 삼도봉을 빼놓으면 서운할 것 같아서 삼도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뭐 사실 딱히 볼 건 없지만..
사실 풍경보다는 이 조형물이 가지는 의미 탓에 이곳에 오지 않나 싶다.
10시 방향 경상남도, 2시 방향 전라남도, 6시 방향 전라북도 이렇게 3도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경치는 별로 볼 게 없다.
다람쥐가 몇 마리 보이는데, 멀리 도망가지도 않는다. 아마 여기에 터를 잡고 등산객에 기대어 사는 방법을 터득한 녀석들 아닌가 싶다. 언제 봐도 치명적인 귀여움이다.
위 사진을 끝으로 카메라 배터리가 나갔다. 지난 산행 후에 충전을 제대로 안 시켰나 보다. 가끔 챙겨 다니는 스페어 배터리도 마침 없어서 돌아오는 길엔 사진이 없다. 핸드폰으로 찍은 마지막 한 장이 아래의 풍경이다.
사진 안 찍고 열심히 걷기만 했더니 예상보다 빠르게 복귀했다. 노고단 고개를 지나 내려가는 길에도 여전히 방문객이 한가득이다. 가족과 함께 힘겹게 올라오는 어린이에게 힘내라고 응원도 보내며 즐겁게 하산했다.
어서 이 더위가 가셔야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참고] 성삼재(노고단) 노선버스 운행중단
2022년 8월부터 구례운수에서 운행하던 성삼재 노선버스가 운행중단한 상태다. 올 초에도 중단됐다가 재개된 적이 있어서,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를 일이긴 하다. 현재 공지된 바로는 내년 7월 말까지 1년을 휴업한다고 하니, 대중교통편으로 지리산 산행계획을 세울 분들은 이 노선버스의 운행여부를 잘 확인하셔야 한다.
용산에서 출발하여 구례구역에 새벽 3시쯤 도착하던 기차가 없어져 버리고, 동서울터미널에서 성삼재로 바로 오는 고속버스가 생긴 탓에 노선버스 탑승객이 많이 줄긴 했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대책 없이 운행중단을 받아들이는 구례군의 태도가 참 이해되질 않는다. 바로 옆, 남원시의 정령치 순환버스를 보면서 뭐 느끼는 것도 없나 보다. 이 훌륭한 관광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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