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역대급 반전" 남해 응봉산 - 설흘산 산행

epician 2022. 11. 18. 01:57

최근 자동차가 말썽이라 서비스센터 쫓아다니며 갑질 아닌 갑질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결국, 엔진 교체를 받고 증상이 말끔히 없어지긴 했는데, 교체받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운행하며 스트레스 잔뜩 받고. 기아 서비스센터에서 당한 갑질을 생각하면 아직도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잘 안풀려 우울하던 중, 저런 문제까지 겹치니 등산 다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지난 계룡산 산행 이후 다시 산행을 재개하기까지 근 두 달이나 지났다.

어느 산악인의 추천

아는 형님이 등산 동호회 활동을 오래 하셨다길래, 괜찮은 곳을 여쭈었고, 그렇게 추천받은 곳 가운데 하나가 '남해 설흘산'이었다. 사실, '남해'라서 별 기대를 안 했다. 남해군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묻혀 계시는 곳으로 어릴 적부터 성묘나 친척의 관혼상제가 있을 때마다 자주 찾던 곳이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박힌 이미지는 그저 한적한 시골 그 이상은 아니었지 싶다.

미리 다녀왔던 분들의 산행기를 몇 개 찾아보긴 했으나, 역시나 크게 기대되진 않았다. 그냥 동네 뒷산이겠거니 싶어서 등산도 할 겸, 이번 추석에 못 갔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도 할 겸 그렇게 찾았다.

코스

지도를 보며 코스를 구상하다 응봉산과 연계하여 설흘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시계방향으로 돌았는데, 주차는 가천 다랭이마을 동쪽에 있는 외곽 주차장에 했다. 평일이라 아주 한적했다.

산행 코스

5.7km에 3시간 50분 소요됐다. 사전정보로는 5km 코스라길래 넉넉히 3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예상보다 거리도 더 늘어났고, 경치가 좋아서 사진을 많이 찍다 보니 더 지체된 감이 있다.

만만한 동네 뒷산 같은 구성이라 짐도 최소한으로 챙겼다. 작은 크로스백에 티슈, 생수 한 병, 샌드위치 한 개, 탄산음료 한 개, 초코바 한 개, 초소형 똑딱이 카메라 하나 넣고 채비 끝~

출발

다랭이 마을

다락논으로 유명한 다랭이 마을을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지, 직접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가족들이 놀러 가지고 할 때도 다른 일 때문에 혼자만 빠졌었다. 관광지 돌아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탓인지 보자마자 주변 풍경이 너무 훌륭하다.

가을가을한 다랭이 마을 풍경
응봉산 암릉

형제처럼 올망졸망한 저 암릉이 정상은 아니고, 응봉산 정상부는 오른쪽 뒤편의 맨끝 봉우리다. 저 암릉 능선을 타고 넘어가야 한다. 산 모양새가 제법이라 출발 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다랭이 마을 배경의 설흘산

도로를 따라 등산로 입구까지 걸었다. 동네 배경이 되어주는 응봉산과 설흘산도 멋지지만, 비탈진 땅의 다락논이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도 신선하다.

응봉산 등산로 입구

도로에서 응봉산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면, 예쁘장한 농로가 반겨준다.

응봉산 등산로 초입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올라가면 진짜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응봉산 암릉
반대편 설흘산 조망
진짜 등산로 입구

저 계단부터 진짜 응봉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기름 냄새가 덜 빠진 것을 보니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계단 같다. 저 계단 덕분에 초반의 가파른 구간을 날로 먹듯 올라갔다.

응봉산 등산로 초반부

정말 가파른 경사인데, 계단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가을옷 입은 노린재

계단 난간에 노린재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그 색깔이 영락없는 가을색이다. 이 녀석들도 사마귀처럼 보호색 위장이 가능한 건지, 원래 저렇게 태어나는 종인지 궁금해진다.

계단 끝~

계단이 끝나고 나면 능선길과 합류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능선길을 타고나면 경사가 완만해서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풍경이 놀라웠을 뿐~

응봉산 능선길

길도 넓고, 윤곽도 또렷하고, 경사도 완만해서 걷기에 정말 좋았다.

응봉산 암릉 뒤편

암릉을 지나는 구간은 중간 중간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등산로 정비상태는 정말 훌륭하다!

응봉산 암릉 뒤편
암릉에 놓인 계단

중턱쯤 올라오면서부터 조망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응봉산 아래로 보이는 바다 (여수 방향)

하필이면 이 날, 전국에 안개가 많이 꼈었다. 아침 일기예보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바다에 옅은 해무가 가득하다. 답답한 시야 탓에, 새파란 하늘과 시퍼런 바다를 보기 위해서라도 비 온 뒤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봉산 중턱에서의 바다 조망 (여수 방향)

응봉산 암릉부

응봉산 암릉

응봉산 암릉에 올라서면 응봉산 정상과 설흘산 정상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감탄이 터진다.

응봉산 정상부
응봉산에서 설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설흘산 정상부

기대가 너무 없었던 탓인지 알록달록한 가을산의 색깔도 기가 막히고, 유려한 산세에 이 정도면 최소 도립공원급 아닌가 싶은 의문도 마구마구 터져나왔다. (도립공원은 커녕 군립공원으로도 지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을 옷 입은 설흘산

응봉산 정상부

암릉부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걷는 내내 평탄했다.

이정표

응봉산 정상까지 600m 남았다는 이정표에, 이제 곧 매운맛 오르막이 나오겠구나 짐작을 했다. 그러나, 운수 좋게 오늘은 꽝이다. 욕이 나올 정도로 가파른 경사는 없었다. ㅎㅎ

응봉산 정상부 오르막길

가끔 길의 윤곽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특히, 낙엽 깔린 계절이라 더 그랬는데.

길의 윤곽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곳

그럴 때마다 최적의 포인트에 등산객이 매달아 놓은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등산객의 리본

정말 리본 덕에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구간이 없었다.

오래된 묘지 옆을 지나는 길

간혹 높디 높은 산 꼭대기에서 묘지를 만난다. 응봉산에도 몇 기 보이던데, 대부분 관리가 안된 탓에 잡풀이 무성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높은 산꼭대기에 묘를 만들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응봉산 정상

응봉산 정상에 정말 수월하게 올랐다. 여유롭게 걸어서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 듯하다.

응봉산 정상
응봉산 표지석

최근에 정상석 없는 산을 몇 군데 다녔더니 괜한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여긴 표지석이 있다. ㅎㅎ 너무 작아서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

응봉산 정상에서의 조망 (설흘산 방향)

응봉산 정상의 조망도 아주 좋다. 설흘산 방향을 보면 뒤편으로 금산이 보이는데, 안개 탓에 또렷하진 못하다.

응봉산 정상에서의 조망 (여수 방향)

정상석 옆에서 인증샷도 남기고, 풍경도 실컷 즐기다 설흘산 쪽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다.

설흘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응봉산 - 설흘산 능선부

응봉산 하산길 (설흘산 방향)

응봉산을 내려가는 길은 초반엔 조금 가파르나, 조금만 내려가면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걷기 좋은 능선길이 등장한다.

응봉산 - 설흘산 능선길
능선길의 가을 풍경
능선길의 가을 풍경
능선길에서의 조망

설흘산과 다랭이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능선길에서의 풍경도 정말 훌륭하다. 안개 없고 미세먼지 없는 날, 꼭 다시 오리라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놀라웠던 능선길

완만한 능선길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정말 여긴 완벽 그 자체였다. 임도 마냥 넓은 길에 평탄한 경사, 수려한 풍광까지 흠잡을 게 하나도 없었다. 훗날 누군가와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능선길의 가을 풍경
능선길의 가을 풍경
능선길의 가을 풍경

비단처럼 깔린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도 제법 좋았고, 가을을 못내 아쉬워하는 앙증맞은 들꽃이 눈길을 사로 잡기도 한다.

작은 들꽃 #1
작은 들꽃 #2
첫 번째 삼거리

여기서 직진하면 설흘산 방향이고, 우측으로 빠지면 다랭이 마을로 내려가는 임도로 연결된다. 굳이 설흘산 구경을 안 해도 되겠다 싶은 분들은 여기서 다랭이 마을로 내려가는 걸 추천드린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설흘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이 상태가 너무 좋지 못하다.

설흘산

첫 번째 삼거리를 지나면서, 이제 곧 설흘산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겠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다시 꽝이다. ㅎㅎ 여긴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올라가는 경사가 완만하다.

곧 나올 오르막을 기대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던 풍경

영락없이 거친 오르막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다행히 예측 실패다. ㅋ
이 길을 지나고 나서도, 조금 좁아지긴 하나 완만한 능선길이 한 동안 계속됐다.

설흘산으로 오르는 능선길
설흘산으로 오르는 능선길

응봉산에서 보면 설흘산 정상부 봉우리가 제법 뾰족하여 오르는 길이 가파를 거라고 예상했다. 근데, 막상 들어와 보니 정상부로 바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북쪽 사면을 타고 옆으로 한참 돌아서 올라간다. 그 덕에 오르는 길이 가파르지 않았다.

능선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설흘산 정상부
능선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설흘산 정상부

능선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사진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설흘산의 웅장한 서쪽 사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정말 직접 봐야 감탄할 풍경이다.

두 번째 갈림길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걷다보니 두 번째 갈림길에 도착했다.

두 번째 갈림길 이정표

설흘산 정상(봉수대)까지 400m가 남았다는 이정표다. 그리고, 이정표 방향으로 직진하면 곧 나오는 오르막길.

넓고 편안한 오르막길

이 길을 보고 곧 급경사가 나오겠구나 하고 다시 짐작을 했으나, 또 꽝이다. 정말 이렇게 오르막길이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다.

비스듬한 북서쪽 사면을 타고 느긋하게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다시 나타난다.

마지막 갈림길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설흘산 정상이다.

설흘산 정상을 앞둔 마지막 오르막 구간

짧은 오르막 구간을 지나면 정상부의 봉수대가 눈에 들어온다. 길이 잠깐 헷갈렸으나, 나뭇가지에 잔뜩 매달린 리본을 보고 길을 찾았다.

설흘산 정상

설흘산 봉수대(정상)
설흘산 봉수대

설흘산 정상에 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옆의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생뚱맞게 봉수대 꼭대기에 설흘산 정상석이 있다. 이 사진을 끝으로 한 동안 안 쓰고 처박아뒀던 카메라의 배터리가 나갔다. 이후로는 핸드폰으로 몇 장 남겼다.

설흘산 정상석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겨야 하나, 여기 정상석은 위치도 크기도 모두 하자라는 생각이 든다. 인증샷 남기자고 봉수대 벽을 타고 올라가기도 좀 그렇고.

어쨌든, 봉수대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이 훌륭하긴 하다. 오전보다 안개가 조금 옅어져, 보이지 않던 건너편 여수의 윤곽도 눈에 들어온다.

설흘산 봉수대 조망 (다랭이 마을 방향)

산 아래로 다랭이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오른쪽의 뾰족한 산봉우리는 아까 지나왔던 응봉산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편의 희미한 윤곽이 여수 돌산(돌산도)이 아닌가 싶다.

설흘산 봉수대 조망 (여수 방향)

응봉산 뒤로 여수가 건너다 보인다. 안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설흘산 봉수대 조망 (금산 방향)

전혀 기대에 없었던 응봉산, 설흘산에 놀라고 나니 자연스레 국립공원인 금산에도 관심이 급하게 생긴다. 다음은 아마도 금산행 ㅎㅎ

설흘산 봉수대 조망 (금산, 노도 방향)
설흘산 봉수대 조망 (소치도 추정)

망망대해에 작은 섬 하나가 콕 박혀 있다. 지도를 찾아보니 소치도가 아닌가 싶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풍경은 옅은 안개가 낀 날에만 누릴 수 있는 묘한 분위기 아닌가 싶다.

하산

봉수대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게 조금 헷갈렸으나, 리본 덕에 대충 때려 맞춰보니 하산하는 방향이 맞다.

봉수대 하산길에 달린 리본

이번 산행은 리본이 정말 열일했다. 낙엽이 워낙 많아서 길 윤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구간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리본이 길을 안내해줬다. 땡큐~~

하산길?

도무지 하산길 같아 보이지 않는 바위틈의 이 오르막길을 리본을 보고 찾아갔다. 이 길을 지나면 다시 조망이 좋은 암릉이 나타난다.

하산길에 응봉산 조망

여기서 보는 응봉산의 뷰도 나름 웅장하다. 동네 뒷산이 이렇게 산세가 좋아도 되는 건가 싶다.

하산길에 내려다 보이는 남해바다
하산길에 내려다 보이는 남해바다

풍경에 거듭 감탄했는데, 좋았던 기억은 여기까지다. 이 암릉을 지나면서부터 내려가는 길이 너무 안 좋다.

비탈진데, 낙엽이 두터워서 미끄럽고, 딱히 등산로 정비를 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냥 동네사람들이 오르내리며 만들어진 야생의 길 그 자체였다. 돌계단은 커녕, 그 흔한 폐침목 계단도 안 보인다.

내려온 길을 돌아보며

방금 내려온 길을 뒤돌아봐도 도무지 어디가 등산로인지 파악이 안 된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달린 리본을 등대 삼아 헤매지 않고 내려왔다.

너덜지대

한참 내려오다 보면 산 아래에서 올려다 보였던 너덜지대가 옆으로 보인다. 이 구간을 지나면 곧 하산이 끝난다.

너덜지대 가장자리를 지나는 등산로
등산로 옆으로 올려다 보이는 너덜
등산로 날머리

리본이 매달린 저곳이 이번 등산로의 끝이다. 산행 4시간이 조금 짧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집까지 졸지 않고 운전할 기운이 남았으니 당일치기로 더없이 훌륭하다는 생각도 든다.

등산로 날머리에서 본 풍경

소회

설흘산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이 너무 안 좋긴 했으나, 기대감 0%가 던진 반전은 참 대단했다. 이만하면 풍광도 훌륭하고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 참고로 남해터미널에서 가천마을까지 운행하는 농어촌 버스가 있으니, 남해군까지만 올 수 있다면 대중교통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

응봉산에서 얻은 매력 덕분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금산도 가보고 싶어졌다. 국립공원이라 여기보다 더 좋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참고 - 농어촌 버스 시간표

가천행 농어촌버스 시간표

유명한 관광지라 농어촌 버스 운행시간이 나름 촘촘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분들은 위 시간표는 참고만 하고, 남해군청 홈페이지에서 바뀐 시간표를 꼭 다시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