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부상으로 한 동안 등산을 못했다. 지난달 중순 경, 속리산을 가려고 계획했다가 준비운동 겸 순천 금전산으로 가볍게 나섰었다. 금전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살짝 다쳤다. 스텝이 꼬이면서 요상한 자세로 미끄러졌더니, 인대에 무리가 왔나 보다. 하여, 요 근래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릎은 안녕하신가 점검하는 일이었다. 앉았다 일어설 때 통증은 없는지, 체중을 실어 비틀면 통증은 없는지 매일 아침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일상이었다.
넉넉히 20여일 운동을 안 하고 쉬었더니, 무릎도 나은 듯하고 속리산행 날짜만 잡으면 되는 순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스케줄
요 근래 광주 동생집에 갈 일이 잦았다. 이번엔 갔다가 그냥 오기 뭣해서 등산이나 하고 올까 싶어 근처에서 못 가본 산을 물색했다. 예전에 내장산 여덟 봉우리 가운데 두 개를 못 찍고 물이 떨어져 후퇴했었는데, 그 두 개를 찍고 올까 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백암산으로 눈길이 갔다.
백양사를 기점으로 코스를 구상해 보니 12km, 넉넉히 6~7시간이면 충분하겠다 싶어서 실행에 옮겼다.
코스
가인주차장 (백양탐방안내소)를 출발하여 백양사, 약사암, 백학봉, 상왕봉, 사자봉을 거쳐 다시 가인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약 12km에 내장사 구경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5시간 30분 정도 소요됐다.
가인주차장은 1일 주차비 4,000원이다. 이 아래쪽에서 주차장이 몇 군데 있긴 한데, 거긴 무료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출발
가인주차장에 주차하고 보니 그 뒤로 백학봉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간밤에 모기 잡느라 잠을 설치다가 일찍 나왔더니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다. 이 얼마만의 아침 산행인지 ㅎㅎ
단풍철 포토존으로 유명한 백양사 쌍계루를 이렇게 본다. 단풍은 없더라도 물에 비친 반영 덕에 꽤 인상적인 풍경이다.
백양사는 아주 어릴 때 수학여행인가, 단체여행인가 한 번 왔던 기억 빼곤 없다. 굉장히 큰 절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다. 어린 눈에는 그렇게 크게 보였나 보다.
대웅전 뒤편에 사리탑이 있는데, 역시나 이 풍경의 마지막 한 획은 백암산 백학봉인 듯하다.
백양사 구경을 간단히 마치고 산행길로 접어들었다.
백학봉 탐방로 기점에 설치된 차단시설이다. 그 뒤편으로 심각한 경사도의 탐방로가 보여서 놀랐다. 여기도 초반부터 자비 없는 경사려나 싶어서 ㅎㅎ
백학봉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는 것은 알고 왔다. 가파르든 말든, 처음 가는 길이라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앞선다.
페이스 조절 잘하라는 격려문구로 이해했다. 정말 재밌게도 약사암 부근까지 딱 10분 정도 걸린다.
눈에 보이는 경사는 참 가파른데, 막상 올라가는 길을 이렇게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아 경사를 낮춰준다.
이 아름다운 길을 지나니 곧 전망대가 나타났다.
걸어보고 난 후의 소감인데, 백암산은 조망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조망은 포기해야 하지만, 숲과 계곡이 울창하고 깊어서 좋았다. 특히, 능선쯤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니, 그 소리에 귀도 즐겁고 청량한 기분이 제대로 든다. 마른땅에 단비가 내리 듯, 지쳐 있던 내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
약사암
나름 현대적인 저 건물이 약사암인 줄 알고 조금 놀랐다. 다행히(?) 약사암 본당은 저 건물 위쪽 절벽 아래에 있었다.
등산로가 약사암 앞을 지나도록 되어 있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사진으로 다시 보니 자주 찾고 싶은 묘한 이끌림이 생긴다. 마음 심란할 때 찾아가게 집 근처에 이런 암자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약사암 위쪽에 석간수가 나오는 작은 동굴이 있다. 입구는 아래처럼 생겼고, 처음보곤 무슨 전망대쯤 되나 싶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이 고일 수 있게 만들어 뒀다. 관리가 잘 되는지 눈으로 보기엔 아주 깨끗하다.
바위틈에 꽂힌 파이프에서 물이 저렇게 떨어지고 있다. 생수병 비우고 하나 꽉 채워 산행 내내 마셨다. 물맛은 철분을 머금은 바위의 영향인지 일반 생수보다는 약간 시큼한, 느끼기 어려울 만큼의 시큼한 맛이 살짝 났다.
영천굴 위쪽은 건물 모양새만 보고, 정자처럼 새워진 전망대쯤 되나 싶었다. 그래서 올라가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올라갔는데...
정자처럼 보였던 건물을 올라가니 내부가 이렇게 꾸며져 있다. 있는 줄 모르고 그냥 갔더라면 서운할 뻔.
만만치 않은 오르막
백학봉 오르는 길이 경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왔는데, 약사암 영천굴까지는 솔직히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 가야산, 금전산 등을 다녀와서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싶은 의문도 가졌었다.
그러나, 영천굴을 지나니 사악한 경사의 계단길이 이어진다. 그제야 어렵다는 구간이 여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전난간부터 시작해서 방부목 계단, 돌계단 온갖 종류의 계단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낙석방지용 철망이 씌워진 터널 같은 계단길도 나온다. 이색적인 경험이라 나쁘지 않았다.
이 길은 예전에 어느 외국 영상에서 봤던 느낌이다. 가파른 계단길 옆으로 쉬어가라고 작은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일찍 나온 탓에 정말 오랜만의 아침 산행이다. 덕분에 이런 햇살도 구경한다.
조망이 살짝 터지는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백양사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추가로 증축된 건물이 많은지 다소 복잡하고 어지러운 느낌이다.
낙석에 대비해서 계단 위로 철망을 둘러놨는데, 그 모습이 갱도처럼 다가와서 참 신선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르막은 함정 ㅋ
머리 위로 산 아래에서 봤던 하얀 암릉이 보이길래 이제 다 올라온 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한참 더 가야 백학봉 정상이 나온다.
아까 봤던 암릉에서 20여분 더 걸은 후에야 백학봉 정상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주변 풍경이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최근에 조각 같은 암릉이 펼쳐진 산을 많이 다녀서 그런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하이라이트는 능선길
백학봉에서 기린봉, 상왕봉, 사자봉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이 정말 걷기 좋다. 큰 오르막 없는 편안한 길이 3.5km 정도 이어지고, 사자봉에서 가인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무난한 경사로 걷기 편했다.
능선길 대부분은 조망이 나오진 않았으나, 가끔 이렇게 조망이 터지는 구간도 있었다.
백학봉에서 출발한 지 1시간여 만에 상왕봉에 도착했다.
여기도 크게 경치가 좋다거나 암릉이 기가 막힌다거나 그런 건 없었으나, 몇 달 사이 더없이 푸르러진 산천의 고운 빛깔이 큰 위안을 준다.
상왕봉에서 사자봉으로 가는 길 쯤이던가, 계곡 아래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올라온다. 나뭇잎이 재잘거리듯 바람에 날리는데, 귀도 즐겁고 땀을 식혀주는 청량감도 대단했다. 요 근래 고민이 많아서 불면증에 시달리던 차였는데, 그 스트레스가 여기서 싹 씻겨나간다.
백학봉에서 사자봉까지 다들 고만고만한 높이라 고저차가 크지 않아 걷기 편했다. 여기도 조망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고만 고만한 풍경 중에 그래도 꼭 으뜸을 꼽으라 하면, 사자봉 부근 아닌가 싶다.
하산
사자봉에서 내려가면 약간 조망이 나오는 구간이 있긴 한데, 이내 길은 다시 숲 안쪽으로 향한다.
하산길은 무난할수록 좋다. 그래야 부상 위험도 덜하고. 사자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딱 그랬다.
내려오는 길은 계곡을 끼고 있어서 쏟아지는 물소리도 좋았고, 중간중간 손이라도 씻으며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엉덩이 붙이고 앉을 만한 곳이 없는 건 좀 아쉬웠다.
다 내려오고 보니 참 무난한 하산길이었다. 하산 시간은 출발했던 주차장까지 2시간이 조금 못 걸린 듯하다.
이 차단시설을 지나면 임도 같은 콘크리트 포장길이 가인마을까지 이어진다.
소감
가끔 능선길을 길게 걷고 싶을 때, 지리산엘 간다. 성삼재에서 정령치,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이 경치도 좋고 걷기도 즐겁다. 그런 능선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백암산 능선길도 한 번쯤 걸어볼 만하지 싶다.
고달픈 오르막이 부담스럽다면 가인마을을 기점으로 삼고 반대로 걸어도 좋을 듯하다. 실제로 이 날 산행 중에 만난 분들은 대부분 나와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고민 많던 차에 한 꺼풀 산에 벗어놓고 내려와서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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