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들꽃 가득한 8월의 지리산, 연하선경 산행

epician 2023. 8. 21. 15:57

장마에 발목 잡혀 계획했던 속리산 산행이 무산된 이후, 다들 그러하겠지만 한동안 바깥 활동을 못하고 지냈다. 숙제처럼 밀려 있는 여러 계획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고지대로 올라가는 게 더위 피하기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리산 연하선경을 보러 가기로 생각을 굳혔다.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려니 그것 또한 큰 도전이다. 5시에 겨우 일어나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산행경로

산행경로, 약 19.5km에 9시간 30분 소요

백무동 주차장을 기점으로 해서 참샘, 장터목, 연하봉, 세석 대피소를 거쳐 한신계곡 방향으로 하산하는 19.5km의 긴 코스다. 한 동안 쉬었던 탓에 꽤 무리가 되는 거리라 출발 전에 조금 망설이긴 했다.

산행시작

남원 인월면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TV 지역뉴스 일기예보에서 이 지역에 오늘 비가 내린단다. 어제 확인한 바로는 비소식이 없었는데? 그새 바뀐건가 싶어서 기상청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예보가 바뀌어 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망설이다가 강행을 결정했다. 돌이켜보면 잘한 짓인가 싶기도 한다. 안전이 최우선인데 말이다.

백무동 주차장

백무동 주차장(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203-4)에 도착하여, 산행준비를 마치니 9시 무렵이다. 가을 단풍철이 아니라 그런지 주차장은 굉장히 한산하다. 주차비는 무료고 터미널을 겸하는 건물에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백무교

주차장을 출발하여 한산한 식당가를 지나면 백무교를 건너 국립공원 사무소가 보인다.

백무동 계곡

지리산에서 이 정도는 계곡이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 이런 작은 지류들이 합쳐지는 계곡은 그 너비와 수량이 어마어마하다.

탐방로 근처 야영지

탐방로 근처에 야영지가 있는데, 휴가철 끝무렵이라 그런지 텐트는 많지 않았다. 아름답게 쏟아지는 햇살에 지리산으로 들어섰다는 기분이 들어 몹시 설렌다.

초입의 돌계단길

초입의 경사는 완만하고,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길이라 서늘한 편이다. 숲이 울창해서 햇볕을 바로 받을 일이 없긴 한데, 높은 습도 탓에 쉽게 지친다.

올 여름 긴 장마 탓에 숲모기가 번식을 제대로 못했는지, 모기기피제를 뿌리지 않아도 달려드는 모기가 별로 없다.

지리산 탐방로

지리산에 오르는 이 매력적인 길에 이끌려 이 곳을 자주 찾는 사람도 분명 있을 듯싶다.

지리산 탐방로
지리산 탐방로

참샘터

참샘터에 도착할 즈음되면 오르막의 경사가 조금 올라간다. 고산이 아무리 서늘하다 하여도 높은 습도가 주는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았다.

슬슬 높아지기 시작하는 경사도
참샘터

여기서 물을 보충할까 싶었는데, 참샘에 도착하고 보니 음용수로 부적합하다는 팻말이 서 있다. 물은 장터목에서도 보충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만만치 않은 오르막 경사

참샘을 지나고 소지봉 쉼터까지의 경사가 가장 매섭다. 중산리에서 장터목 가는 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날씨 탓인지 아니면 오래 쉬었던 탓인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진 않다.

매력적인 탐방로

쓰러진 고목이 흙을 가두어 계단 역할을 한다. 돈 들여 만들기도 쉽지 않은 운치 아닌가 싶다.

밀려드는 운무

소지봉 근처에 도착하니 운무가 밀려들었다 흩어지길 반복한다.

소지봉

소지봉 부근

소지봉에서 장터목까지도 계속 오르막인 줄 알았는데, 내려가는 길도 조금 있어서 의외였다. 매섭던 오르막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으나, 지친 탓에 저 고개만 올라서면 장터목이 보이겠지 하는 기대를 여러 번 하고, 여러번 실망했다. ㅎㅎ

지리산 탐방로
지리산 탐방로
지리산 탐방로

언덕 너머로 하늘이 보이면, 장터목에 다 왔구나 싶은 기대를 여러 번 했으나 매번 꽝이다.

장터목 부근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들꽃의 환대를 받았다. 잊고 지냈던 8월 지리산의 꽃밭이 그제야 떠오른다. 그래, 8월 지리산은 야생화의 시간이었지.

빨간 나무 열매

꽃 구경하느라 가다 멈추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샌가, 근처에서 환풍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웅웅웅 하는 진동소음에 장터목 부근에 도착했다는 걸 알아챘다.

장터목

장터목 대피소

장터목에 도착하니 날씨가 어느 분 표현을 빌리자면 곰탕까지는 아니고 갈비탕 정도의 날씨다. 산 허리를 넘는 운무에 시야 좋지 못하다. 날을 잘못 잡은 건가 싶은 불길한 예감이...

장터목의 운무
장터목의 운무

이런 고산의 날씨는 예측하기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있겠나, 마주한 날씨에 빨리 적응하는 수밖에.

장터목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연하봉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천왕봉엘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사람이 많을 거 같아서 거긴 다음에 따로 가기로~

연하선경

지리산 탐방로

지리산 연하선경은 연하봉에서 세석평전까지의 경치 좋은 능선길을 말한다. 그 가운데서도 연하봉 ~ 화장봉 사이 구간이 압권이다. 이 구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고 또 아쉬운데, 복붙 서너 번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리산 들꽃
지리산 들꽃
어깨에 기댄듯한 모양의 바위

뭔가 이름 하나 붙어 있을 거 같은 바위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댄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운무에 휩쌓인 어느 봉우리

연하봉이 아닌가 싶긴 한데 정확하진 않다. 운무에 휘감겨 보일 듯 말 듯한 풍경이 정말 몽환적이다.

지리산 탐방로

운무가 흩어지면 이렇게 길 옆으로 온갖 종류의 들꽃이 반긴다.

8월 지리산의 들꽃

고산의 삶에 적응하여 벌써 한해살이를 마칠 준비를 하는 녀석들도 있다. 무더위 속에서 가을 풍경을 마주하니 아직은 낯설다.

연하봉 부근
연하봉 이정표

이제 연하선경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연하봉에서 화장봉 사이 구간이다. 이 구간이 짧아서 너무 아쉬웠다.

연하봉에서 화장봉으로 향하는 길
연하봉에서 화장봉으로 가는 길
연하선경 능선의 풍경
연하선경 능선의 들꽃

고산지대라 키 낮은 관목과 초본류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이렇게 들꽃 구경을 맘껏 할 수 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연하선경의 이 구간을 처음 보았을 때, 월출산 바람재에서 느꼈던 그 감탄이 다시 터져 나왔다. 아주 맑은 날 다시 올 수 있기를 바래본다.

경치에 감탄하다 보니, 너무 짧아서 아쉽다는 탄식도 계속된다.

촛대봉 부근

촛대봉 부근도 경치가 좋긴 한데, 지나왔던 길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 싶다.

촛대봉 이정표
촛대봉 부근

운무 탓에 시야가 좋지 못해 촛대봉 부근은 대충 훑어보고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세석대피소로 가는 길

세석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천왕봉 옆의 제석봉 탐방로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이날은 안좋은 시야 탓에 멀리 무엇이 보이는지 알기 어려웠다.

세석습지

운무 덕에 물이 모이기 좋은 조건이라 세석평전에 습지가 발달한 모양이다. 탐방로까지 만들어져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보니 수량이 제법 풍부하다.

세석습지
세석대피소

연하선경 구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세석대피소가 눈에 들어온다. 구경하려고 길목까지 내려갔다가 누군가의 우렁찬 통화소음이 거슬려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하산

하산 시작

이번 산행에서 예상 못한 복병은 하산이다. 하산길이 굉장히 거칠어 내려오는 내내 힘들었다.

하산했던 탐방로를 뒤돌아보며 찍은 사진

비탈지고 좁은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오는 게 상당히 힘들다. 하산길 난이도로만 보면 역대급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들지 싶다.

비탈진 하산길
계곡을 건너는 다리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하산길이 이 목교를 지나면서부터 많이 얌전해진다. 거친 구간이 대략 2km 정도이고, 전체 하산길은 8km쯤 된다.

지리산 원시림

하산길이 한신계곡 방향이라 당연히 계곡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그 규모가 예상 밖에 어마어마하다.

지리산 폭포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가내소 폭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올여름 잦은 비 덕분에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정말 일품이었다.

지리산 한신계곡
탐방로 옆 아름드리 나무

아름드리나무가 어마어마한 높이로 주변 풍경을 압도한다. 자주 보기 어려운 모습이라 한참을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산행 끝

열 시간에 가까운 긴 산행이 저 출입구를 마주하며 끝났다. 비 예보에 긴장하며 정신없이 내려왔는데, 운 좋게도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제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긴 휴식기를 어마어마한 산행의 시작과 함께 끝냈으니, 다시 발동걸린 김에 숙제처럼 쌓아둔 다른 곳도 하나씩 하나씩 돌아다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