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를 보러 갈까 궁리하던 중에 자꾸 일이 생겨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가까운 곳으로 억새를 보러 나섰다. 근처에서 억새를 봤던 기억을 떠올려보니 영취산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계획을 짜던 중에 못 가봤던 배틀산을 지나서 중흥삼거리로 내려오기로 했다. 총거리는 8km에 4시간 정도 소요됐다. 거미줄과 씨름했던 걸 감안하면 나름 적당한 시간 아닌가 싶다.
출발
73번 버스를 타고 읍동정류장에서 내렸다. 큰길을 건너면 바로 읍동마을(상암동)이고, 등산로 들머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좁은 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 보니, 몇 번 왔던 터라 얼핏 얼핏 기억이 난다. 주택 사이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등산로 들머리(전라남도 여수시 상암5길 41-1)가 나타난다. 다행히 헤매지 않고 한방에 찾았다.
통행이 많지 않아, 길이 많이 묵어 있다. 아는 길이라 들어갔지 초행이었다면 이 길이 맞나 싶은 의심에 되돌아 나왔을 거 같다.
묵은 길을 지나왔더니 여기저기 무임승차한 풀씨가 한가득 박혀 있다.
인근의 송전탑을 관리하려고 이렇게 넓은 길을 만들었지 싶다. 이 지점 우측으로 마을 안쪽 방향으로 길이 나있다. 아마 마을 안길을 따라 쭈욱 올라오면 여기까지 더 편하게 올 수 있지 싶다.
전반적으로 매우 평이한 수준의 오르막이라 걷기 편하다. 다만, 통행이 많지 않아 풀이 많이 자라 있으니 언제 오던 긴팔에 긴바지는 필수다.
키 큰 편백나무숲을 걷다 보면 멀리 하늘이 열리는데, 예상대로 임도와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정표에 계단까지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다. 잠깐 따뜻한 햇볕 맞으면서 숨을 돌리고, 다시 숲 안쪽으로 들어선다.
이 산이 아닌가벼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억새밭이 나와야 하는데, 어라 잡목에 덩굴이 무성하다. 여기서부터 잘못 온 거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이 진달래밭을 마주하자 잘못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에 억새를 봤던 코스는 더 동쪽에 있는 묘지를 지나는 길이었나 보다. "아, 예전 사진 좀 찾아보고 올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터져 나온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이 경치가 위안이 된다.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뭔지 모를 것이 조금 끼긴 했으나, 바다 건너 남해군까지 선명히 볼 수 있다.
올려다 보이는 저곳이 가마봉(골명재 꼭대기) 아닌가 싶다. 오래전엔 지명이 적힌 작은 팻말이 박혀 있었는데, 데크 공사를 하면서 없애버린 건지, 올라가 보니 팻말은 보이지 않았다.
꽃도 잎사귀도 없는 진달래 터널을 거미줄 헤쳐가며 올라간다. 이번 산행은 사람 한 명 보지 못했고, 계속해서 거미줄 치우느라 걷는 속도가 조금 더뎌진 감이 있다. 영취산은 진달래철만 아니면 아주 한산하다.
내 기억 속엔 이쯤 어딘가에서 억새밭이 나와야 했는데, 기억의 오류로 인해 억새밭이 삭제된 풍경이다. 그렇더라도 꽤 오랜만에 오는 곳이라 크게 서운하진 않았다.
겨울나는 새들에게 마지막을 버틸 식량이 되어줄 빨간 나무 열매가 곱게 달려 있다.
여기 억새를 보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쒸~ 이걸 보려고 올라온 게 아닌데..."
쪽빛 남해바다와 한적한 시골마을 그리고 공업단지가 혼재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기뿐만 아니라 영취산 전체가 그러하지 싶다. 거대한 산업단지의 굴뚝연기를 보면서 등산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희귀한 장소 아닌가 싶다. 좋게 설명했지만 썩 좋은 느낌은 아니란 거 다들 아실 거다.
오르는 내내 경사가 아주 완만하여 무리하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가마봉을 앞둔 딱 여기만 이렇게 가팔라진다. 다만, 가파른 구간이 아주 짧아서 큰 감흥은 없다. ㅎㅎ
가마봉 부근에 올라서니 건너편 광양, 하동, 남해까지 넓은 시야가 펼쳐진다.
가마봉
골명재에서 능선길을 오르면 꼭대기가 가마봉이다. 널리 쓰이는 이름은 아니라 지도를 찾아보고 나서야 기억해 냈다. 작은 표지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넓은 가마봉 한켠에 상암 방향으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산천이 제법 울긋불긋하게 물 들었는데, 역광이라 색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원래 저 봉우리가 진례산이었는데, 영취산으로 지명이 잘못 등록되어 영취산으로 불리다가 최근엔 영취산 진례봉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원래 영취산은 위 사진의 정중앙쯤이다.
영취산에서 자주 봤던 꽃이라 모양은 익숙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찾아보니 용담이란다.
야생화치고는 아주 강렬한 모습이라 한번 보고 나면 그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지도상에 보면 이 근처 어디를 '개구리 바위'라고 적어놨던데, 앞에 보이는 저곳인가 싶다. 눈에 보이긴 수직 절벽 같은데,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올라가기 편하다.
진례봉
거미줄 열심히 치우며 느긋하게 걸으니 진례봉까지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됐다.
전세 내고 혼자 즐기는 산이라 그런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방해하는 건 길을 막는 거미줄과 통신탑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까마귀 밖에 없다.
멀리, 바다에 검역과 입항을 위해 대기 중에 선박이 점점이 보인다.
영취산 진례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여수산업단지, 광양항, 광양제철, 하동화력발전소 등 여느 곳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풍경에, 적응이 쉽지 않다. 그래서, 진달래철 빼곤 등산객이 별로 없나?
진례봉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을 시작했다.
배틀산 방향으로 하산
하산 시작부터 길을 못 찾아서 헤매기 시작했다. 데크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배틀산 방향으로 빠질 기미가 없다. 더 내려가면 도솔암이 나올 텐데 싶어서 내려갔던 길을 다시 올라왔다.
올라오던 중에 보니 데크 밑에 이정표가 숨어 있다.
대충 보니 이 근처에서 배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 분명 있다.
이정표 방향으로 계단 출입구가 열려 있으나, 들어가 보니 길이 묵어서 더 이상 들어갈 엄두가 안 난다.
여기서 살짝 멘붕이 왔다. 길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같아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도 해보고, 다른 길 없나 지도도 다시 확인해 보고.
그러다, 다시 데크 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니 통신탑 옆으로 희미한 길의 윤곽이 보인다. 배틀산 방향이 이 길인가 보다.
데크를 돌아서 들어가 보니 리본도 보이고, 내려가는 길이 확실할 거 같아 여기로 내려가기로 결정~
여기도 통행이 적다 보니 풀이 제법 많이 자라 있다.
이러다 곧 밀림 나오겠는데 싶은 의문이 들 무렵, 안전한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구조물이 나타나 안도할 수 있었다.
평소 볼 수 없었던 영취산 뒤편(북쪽면)을 이렇게 보게 됐다.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산이 훨씬 깊어 보인다.
한참 걷다가 여기가 등산로 맞나 싶은 고민이 들 무렵, 다시 이정표가 등장하며 안도감을 준다.
임도까지 500m 라는데, 길이 불편하니 체감상으론 더 먼 거 같다.
넓은 임도를 가로질러 배틀산 정상으로 오른다.
배틀산 역시 지나는 사람이 적다 보니 길이 뚜렷하지 못하다. 잘못 든 건가 싶은 걱정이 들 무렵에 계단이 나타나서 잘 가고 있다고 안심시켜 준다.
배틀산 정상부에서 돌아온 길을 돌아보면 영취산이 제법 울굿 불긋하다. 남녘의 단풍은 이제 막 시작 아닌가 싶다.
너른 바위의 배틀산 정상부엔 정상석은 따로 없다. 산 아래로 여수산단을 조망할 수 있으니 나름 이색적이긴 하다.
배틀산에서 중흥 방향으로 내려가면 다시 임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이정표를 보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배틀산 하산로에서 직진하면 중흥방향인데, 왼쪽으로 빠지는 '꽃무릇길' 이정표에 잊고 지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 전에 자전거를 타고 여길 지나면서 '꽃무릇길'이라는 이름이 예뻐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그걸 잊고 지내다가 이정표를 보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계획을 바꾸어 꽃무릇길을 따라 흥국사로 내려갈까 잠깐 고민했으나, 계획에 없던 일은 안 하는 걸로. 꽃무릇길은 다음에 다시 찾아야겠다.
살짝 울긋불긋한 산 아래로 흥국사가 내려다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경치라 무척 반갑다.
배틀산 등산로가 생각보다 넓어서 놀랐다.
거의 임도 수준의 너비다. 어떤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 이 정도로 길을 넓게 만들었을 리 없는데, 이유가 뭘까 싶은 궁금증이 하산길 내내 따라다녔다. 길은 넓어서 좋았는데, 거미줄 걷어내느라, 발아래에 혹시 뱀은 없나 경계하다 보니 시원시원한 길만큼 빠르게 걷진 못했다.
배틀산에서 중흥방향은 대체로 완만한 내리막이나, 얕트막한 구릉이 나오기도 한다.
배틀산의 큰 단점이 이 여수산단이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내려가는 길에 중흥삼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산단에서 나오는 소음이 꽤 거슬린다. 그래서, 여길 찾는 사람이 별로 없나 보다.
송전탑 너머로 여수산단이 보이면 거의 다 내려왔다는 신호다.
여기서 10여분쯤 더 내려가면 등산로 날머리가 나온다.
송전탑 관리하느라 설치한 계단인가 보다. 저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서 이번 산행이 끝났다.
이 근처 주소가 '여수시 중흥동 1783번지'이니 찾는데 참고하시라.
산행을 마치고 중흥삼거리까지 내려가는데, 이 근처는 산업단지로 바뀌곤 처음 와보는 터라 방향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굉장히 낯설다.
기분 좋게 산행을 마치고 중흥삼거리에서 68번 버스를 타고 무사히 복귀했다. 영취산이나 배틀산이나 산세가 완만해서 매력 있긴 한데, 인근의 산업단지가 큰 마이너스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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