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 산행 이후 딱 한 달 만에 남덕유산으로 산행에 나섰다.
그 한 달 사이, 안 좋은 일이 연거푸 터져서 다 집어치우고 싸돌아 다니고 싶었으나, 허리가 아파서 한 동안 운신하지 못했다. 뭐가 안 되려니 일도 안 풀리고, 몸도 안 좋고... 그런 시절이다. (아홉수를 제대로 맞는 건가)
기대 없이 떠난 길
주왕산을 다녀온 후에 속리산을 갈까, 설악산을 갈까 궁리 중이었다. 그러나, 신상에 여러 변고가 닥치니 마음이 급변하여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싶다. 그래서, 예전에 기억해 뒀던 곳 중에서 남덕유산이 떠올라 코스만 대강 파악한 후에 짐을 챙겨 떠났다.
느긋하게 운전하여 영각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주차장(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83-1)은 한산한 편이었다. 예상대로 등산객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산행경로는 영각사를 출발하여 영각재, 남덕유산 정상, 서봉을 거쳐 덕유학생교육원 방향으로 하산했다. 하산길이 안 좋아서 예상보다 1시간 정도 오버됐다.
출발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탐방로 들머리가 나온다. 사진 속의 건물은 지도상엔 '영각매점'으로 나오는데, 매점은 운영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 옆에 아주 깨끗하게 관리된 화장실이 있다. 탐방로 중간에 화장실이 없으니 여기서 해결하고 가야 한다.
주차장에서 영각사 방향으로 올라오면 버스정류장 옆으로 탐방로 들머리가 보인다.
초반은 임도 쯤 되는 너비의 도로이고, 국립공원사무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새 두 마리가 소나무 껍질 사이를 요란스레 쪼아대길래 쇠딱따구리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동고비다. 오랜만에 보니 제법 반갑다.
향기는 없었던 거 같은데, 흰꽃을 만개한 산딸나무가 곳곳에 보인다. 조금 늦은 탓인지 아쉽게도 그윽한 향기로 기억되는 층층나무 꽃은 볼 수 없었다.
탐방로 초입부터 영각재까지는 숲 안쪽을 걷는 길인데, 숲이 어찌나 울창한지 조망은커녕 하늘도 제대로 안 보인다. 햇볕을 바로 받는 구간이 적어서 여름 산행지로도 괜찮지 싶다.
영각사에서 남덕유산 정상까지의 탐방로 정비상태는 중간쯤이지 싶다. 걷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국립공원 답다고 칭찬할 정도도 아니었다.
탐방로가 계곡과 나란히 진행되는 구간이 가끔 나오는데, 최근에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물이 마른 상태였다. 지난번에 주왕산 계곡에서 고생을 좀 했더니, 비 안 오는 게 차라리 낫지 싶다. ㅠ.ㅠ
여기 쉼터가 있는 줄 모르고, 한 템포 일찍 쉬어서 올라왔다. 허리 상태가 안 좋으니 무리하지 않으려고, 산행 초반은 40~50분 간격으로 5~10분씩 꼭 쉬어줬다. 그래서일까 평상시보다 여유로운 정신상태다 ㅎㅎ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생각나는 오르막
탐방로 초반 경사도는 중간에서 중상급을 오가는 적당한 경사였는데, 무더위를 앞두고 훌쩍 높아진 습도 탓인지 시원한 아이스 커피가 계속 생각난다.
그러다, 정상까지 1km 정도 남겨둔 시점부터 탐방로의 경사도가 치솟는다. 사전조사가 부실하여 이 구간에 대한 난이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다.
오르막길이 제법 힘들다. 숲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저기가 영각재일 거야, 곧 끝나겠지 등등 ㅎㅎ
오르막이 곧 끝날 거라던 기대와 달리 두 번째 안전쉼터가 등장했다. 이러면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인데?
이정표에 영각재까지 500m, 그리고 다시 정상까지 900m라고 적혀 있다. 500m 우습게 생각지 말고, 이 쉼터에서 숨 좀 돌리고 올라가시라. 지리산 천왕봉 올라가던 기분까지는 아니나, 뒤늦게 봤던 국립공원 안내도에 "어려움"과 "매우 어려움"이라고 적혀 있던 구간 되시겠다. ㅋ
거친 경사에 발걸음이 무거워 힘들어할 무렵, 안전난간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잡고 오를 수 있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영각재를 앞두고 숲 너머로 멀리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초행이라, 저기가 남덕유산 정상인가 싶은 궁금증이 생긴다. 결론을 말하자면 저기가 정상은 아니고, 정상부 근처에 있는 거쳐가는 봉우리다.
올라오는 길의 정비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 터라, 멀리 보이는 나무계단이 다 반갑다. 저 계단만 오르면 영각재다.
영각재
영각재부터 정상까지 900m인데, 안내도 상에 "매우 어려움" 구간으로 안내되고 있으니 충분히 쉬었다 가시길 바란다. 영각재를 지나면서부터 정상부에 진입하여 조망이 열리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풍경이라 어디가 어딘지 쉽게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가장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향적봉 그리고 사진 가운데의 높은 산이 무룡산 아닌가 싶다.
영각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의 난이도가 상당한데, 경치 보느라 자주 쉬며 즐거워하는 바람에 영각재까지 오르던 길에 비해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남덕유산 정상부
정상부에 가까워질수록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다. 높아진 습도 탓에 적운이 많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6월인데, 풍경만 보면 영락없는 한 여름의 모습니다.
왜 여길 남덕유산이라고 부르는지 이 모습을 보고서야 이해했다. 덕유산 향적봉까지 길게 이어진 산줄기가 가희 장관이다. 남덕유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바위 봉우리를 2개 지나야 하는데, 계단으로 되어 있는 이 구간도 경치가 굉장히 좋다.
이 능선에서 주변을 조망하면 이렇다.
장수군 방향을 조망하면 육상 트랙처럼 보이는 곳이 한국마사회 장수목장이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줄기가 육십령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육십령을 넘어 장수군을 거쳐갔는데, 육십령 길이 소문대로 험하긴 하더라.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눈으로 보기엔 험준한 지세 탓에 접근이 쉽지 않아 보이는데,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는데 어렵진 않았다. 다만, 가파른 경사에 계단을 놓다 보니 적당한 보폭이 확보되지 않는 곳이 있었다. 계단을 헛디디는 일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계단 없던 시절엔 어떻게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지세가 거칠다. 물론, 그 덕분에 하늘을 걷는 듯한 짜릿한 경험을 했다. 남덕유산 정상부 풍경에 감탄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날씨가 마저 좋아서 사방을 둘러보느라고 넋 놓고 있었다.
정상
여기도 정상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진 않는다. 거친 마지막 오르막 구간을 지나고 나서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립공원 안내도에 영각사에서 남덕유산 정상까지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안내되어 있다. 나 역시 여유롭게 걸어서 그 정도 걸렸으니 아직은 평균의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았나 보다.
덕유산도 정말 넓다. 이 풍경을 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덕유산 종주에 욕심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다 보니 어디선 본 듯한 산이 저 멀리 걸려 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때려 맞춰 반가운 모습을 찾아냈다. 가야산!
줌을 당겨보니 눈에 익은 그 모습이 가야산이 맞는 듯하다. 첫눈에 반해버린 가야산을 어찌 잊을 수 있나 ㅎㅎ 올해는 밀린 곳이 너무 많아서 안될 듯싶고, 가야산은 내년에나 다시 가보는 걸로~
서봉 방향으로 하산
정상에서 서봉 쪽을 보면 이런 모습인데, 여기서 서봉의 뒷모습만 보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나 역시 기대감 전혀 없이 서봉 쪽으로 하산했는데, 여기서 보는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남덕유산에서 서봉으로 건너가는 길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그나마 앞으로 나올 하산길에 비하면 비단길 수준이다.
서봉으로 향하는 길에 살벌한 각도의 계단이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미리 보았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으나, 다행히 그렇게 길진 않았다.
고도가 높다 보니 늦게서야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이 제법 보인다. 볕이 좋아서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꽃이 눈길을 잡아끈다.
밧줄을 잡고 갈 수 있는 고마운 길이 나타났다. 평소 같으면 이런 길 안 좋아했을 텐데, 잡고 갈 수 있는 밧줄도 없는 길이 곧 등장할 예정이라. ㅋㅋ
아까 멀리서 봤던 계단이 보인다. 예상만큼 힘들진 않았는데, 통행이 많지 않은 탓에 풀이 무성히 자라 계단을 뒤덮기 일보직전이었다.
서봉에서 내려 뻗는 산줄기가 육십령이 되고, 그 육십령을 기준으로 왼쪽은 경상남도 함양군, 오른쪽은 전라북도 장수군이 된다.
길 끝에 하늘이 걸린 저 모습에 여기가 서봉 정상인줄 알았다. 그러나, 올라가 보면 여긴 헬리포트이고 서봉 정상은 서쪽으로 몇 걸음 더 걸어야 한다.
여기서 보는 풍경도 가히 장관이다.
바로 앞으로 높은 봉우리가 지나왔던 남덕유산 정상이고, 그 산줄기를 따라가면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과 설철봉까지 보인다.
서봉 정상
서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정말 대단하다.
커다란 암릉 사이로 난 오솔길의 풍경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서봉에서 육십령까지 7.3km라고 안내되어 있으나, 육십령까지 가지 않고 덕유학생교육원 방향으로 빠지면 5km가 조금 넘는 정도다.
육십령 방향으로 하산
남덕유산 정상에서 서봉을 바라봤을 땐, 이런 모습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따로 이름을 붙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굽이치는 오솔길이 만드는 그림 같은 풍경에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보기엔 좋았던 저 길이, 마사토로 된 미끄러운 길이라 하산하는 내내 진행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하산길에 뒤돌아보면 서봉과 남덕유산 정상이 나란히 눈에 들어오는데, 그 풍경 또한 장엄하다.
부지깽이라도 들고 내려가야 할 길
도저히 길처럼 보이지 않는, 수해가 남긴 흔적처럼 생긴 길이 하산길 곳곳에 등장한다. 마사토라 어찌나 미끄러운지 스틱 없이 내려가려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평소 귀찮아서 스틱을 챙겨 다니지 않는데, 여길 내려가려면 부지깽이라도 하나 챙겨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는 사전조사가 부실하여 어려움을 겪었는데, 여길 가볼 생각이라면 꼭 등산스틱 챙기시라.
미끄럽고 위험하던 길은 아래의 계단길을 지나면서부터 조금 나아지나, 그렇다고 해서 여느 국립공원처럼 길이 좋진 않더라. 육십령 방향 탐방로는 동네 야산보다 정비상태가 안 좋았다.
덕유학생교육원 방향 갈림길
서봉에서 3km쯤 내려가다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빠져야 덕유학생교육원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다.
여기서 (삼자봉) 주변을 둘러보면 덕유학생교육원 방향 안내판이 붙어 있다.
저 안내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겨보면 길처럼 보이지 않는 갈림길을 찾을 수 있다.
역시나 생김새가 길처럼 보이지 않아서 여기 맞나 싶은 생각을 잠깐 했다. 덕유학생교육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나 정비 상태는 이름 없는 동네 야산만도 못하다.
마사토 지형이라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
고운 자태의 산딸나무를 여기서 또 본다. 산 위에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산딸나무는 너무 높은 지대에선 자라지 않나 보다.
덕유학생교육원 방향은 출입불가
OSM 지도를 참고하여 덕유학생교육원을 가로질러 영각사 공영주차장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왔는데, 막상 그 지점에 도착하니 학생교육원 방향은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잠깐 당황했는데, 안내판을 참고하여 공영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했다.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아 이거 낭패다 싶었는데, 막상 걸어보니 학생교육원을 가로지르는 것과 얼마 차이 나지 않았다.
안내판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계곡을 지나 마을로 접어든다.
다리가 없는 계곡이라 비가 많이 온 후엔 건너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마을 길을 따라 쭈욱 내려오면 '이산 책판 박물관' 건물을 지나 영각사 공영주차장으로 갈 수 있다.
소회
큰 기대 없이 왔던 곳이라 그런지, 아름다운 풍경이 남긴 여운이 상당하다.
서봉방향 하산길이 고달프긴 했지만, 서봉의 그 풍경 또한 그냥 지나치면 서운하리 만치 아름다웠다. 탐방로가 보수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빨리 해결될 리는 없어 보이니 서봉 방향으로 오르거나, 내려올 계획이라면 꼭 등산스틱 챙겨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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