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면 높은 산으로 등산을 가곤 했는데, 재작년 반야봉 여름산행에서 실패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 올해는 계곡을 끼고 있는 산행지를 물색했다. 재작년 반야봉에서는 운무를 제대로 만나, 인생최고의 습도를 경험했었다. ㅋ
그렇게 계곡산행지를 물색하다 보니, 예전에 가려다 말았던 남원의 "지리산 구룡계곡"이 생각났다.
코스
육모정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개미정지를 지나 구룡치에 올랐다가 구룡계곡길을 따라 내려오는 약 9.5km 거리이며, 4시간이 소요됐다. 나는 중간에 샛길로 잘못 내려오는 바람에 거리가 조금 줄었는데, 정규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약 10km 남짓이지 않을까 싶다.
출발
육모정 주차장(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24-5)에서 9시에 출발했는데, 평일 아침이라 주차장은 아직 한산하다.
매미소리 요란한 여름아침인데, 인적이 드문 탓인지 요란한 매미소리마저도 전원의 이 고요함을 깨우지 못한다.
넝쿨이 낮은 돌담을 덮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제주도의 어느 마을 안길 같았다. 다행히 햇볕이 구름에 반쯤 가렸다 나왔다 하는 덕에 그늘 없는 길에서도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자동차 다니는 길을 피하려고 마을 안길과 농도를 따라 걸었다. 들판을 보니 모내기를 일찍 한 곳은 이미 알곡이 노랗게 익어 간다.
며칠 전이 입추라 하여도 계절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익어가는 벼를 보니 가을도 금방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한 들판에 벼가 익어가고 있다. 수로로 쏟아지는 맑은 물을 보니, 이왕이면 여기서 나는 쌀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바람에 희미하게 섞여오는 비릿한 농약 냄새는 함정 ㅋ) 농약 안치고 화학비료 안 뿌리고, 벼농사짓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 그런 건 수긍하고, 물이라도 맑은 곳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농로를 지나 다시 마을길로 합류하는 곳인데, 여기서 우측 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지리산첫길
등산로를 향해 걷다 보니 이 길의 이름이 참 인상적이다.
짧고 간결하게 지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이름이지 싶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박수 짝짝짝~~
은송저수지를 지나면 조그마한 경작지와 묘지 등이 보인다. 그 길을 따로 곧장 오르면 등산로 초입이 나타난다.
비포장 길이 나오는가 싶으면 곧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며 등산로가 시작된다.
개미정지
잘 생긴 청개구리 한 마리가 예의 바르게 두 손 곱게 모으고 차단기 위에 앉아 있다. 배가 볼록한 걸 보니 저기가 나름 명당인가 보다.
내가 알기론 남쪽지방에선 부엌을 사투리로 '정지'라고 부르는데, 다른 자료를 검색해 보니 이곳에서 쓰인 '정지'는 '쉼터'를 의미하는 사투리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경남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곳에서 깊게 잠들었는데, 개미에게 물어 뜯기는 꿈을 꾸고 놀라 깬 덕에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개미정지'로 불리게 됐다고.
탐방로
초입의 개미정지를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울창한 숲 안쪽을 지나는 길이라 햇볕을 바로 맞을 일은 없다. 그래서 여름철 산행지로 제격이다. 능선길에서 햇볕에 타 죽을 듯한 고통을 받는 것보단 조망은 없더라도 숲 안쪽을 걷는 게 여름엔 더 좋다.
계획을 짜면서 다른 사람이 쓴 산행기를 몇 개 찾아보고, 반바지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반바지 산행을 감행했는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중간에 계획에 없던 샛길로 빠지면서 풀에 좀 쓸렸는데, 정규 탐방로만 벗어나지 않으면 반바지 산행이 가능하다.
대부분 그늘이긴 해도 여름 더위는 어쩔 수 없다. 걸을 땐 그나마 괜찮은데, 잠깐이라도 멈추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길 너머로 하늘이 걸리는 걸 보고, 작은 언덕이겠구나 싶었다.
첫 번째 언덕에 올라서니 너른 쉼터가 보인다. 이정표가 있어서 자세히 훑어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지리산둘레길이었네
보통 산행코스를 계획할 때, 몇 가지 지도를 참고한다. 그 지도들엔 지리산둘레길 정보가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지리산둘레길 '주천 - 운봉' 구간의 일부였다.
구룡치가 있는 해발 580m 근방까지 올랐다가 산허리에 있는 평탄한 길을 2km 정도 걷는다. 어쩐지 길 자체가 사람이 많이 다닌 흔적이 있다 했다.
쉼터를 지나면 바로 앞에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임도처럼 넓을 길을 따라가면 안 되고, 이정표를 따라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걸어본 적이 없는데,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둘레길이라 그런지 곳곳에 엉덩이 붙이고 앉을 만한 곳이 많다. 여느 등산로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라 약간 어색하다.
숲 안쪽을 걷는 길이라 시야는 좋지 못하다. 올라가는 중에 볼 수 있는 바깥 풍경은 겨우 이 정도.
구룡치
오르막 난이도는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다. 구룡치를 앞두고 살짝 가팔라지는데, 평소 등산을 하던 분들이라면 무리 없을 정도라 생각한다.
이번 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구룡치에 도착하고 보니, 표식이라곤 이정표 밖에 없다.
이정표 옆에서 인증샷 남기긴 애매해서 비 오는 흐르는 땀이나 식히려고 벤치에 앉았다. 음료수 하나 마시고 있는데, 근처에 말벌집이 있는지, 제법 큰 말벌 2마리가 내 근처에 와서 열심히 경계를 한다. 결국, 벌에 쫓겨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올라오는 중에는 쇠파리 같은 것들이 미친 듯 달려들어 귀찮게 하더니, 구룡치에선 말벌까지 편히 쉬질 못하게 하네.
구룡치를 지나면 드디어 둘레길 다운 평탄한 길이 길게 이어진다. 대략 2km 정도. 한 여름 평일이라 사람 한 명 없는 길을 전세내서 걸었다. 쫓아다니는 파리만 없었더라면 더 완벽했을 거 같은데. 어디 파리기피제는 없나?
곧게 뻗은 나무가 들어찬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나무가 내뿜은 수증기인지 근처가 조금 뿌옇다.
비법정탐방로
OSM 지도를 참고해서 코스를 구상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OSM 지도에 올라온 저 길에 비법정탐방로(샛길)이었나 보다. 들어갈까 말까 잠깐 고민했으나, 아예 막아둔 것을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계획을 바꿔서 둘레길을 따라 더 걷기로 했다. 어차피 예상보다 빨리 올라와서 시간도 많이 남았고.
샛길을 지나쳐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곧 인증 포토존 표지판이 나온다. 귀찮게 달려드는 파리떼 때문에 사진 찍을 상황이 아니라 그냥 지나쳤다. 사람이라도 많으면 1/N을 했을 텐데, 나 밖에 없으니 온 동네 파리가 다 모여든 느낌이다.
널찍한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작은 실개천도 지나고.
길 옆에 놓인 저 표지판이 뭔가 했는데, 앞 쪽에 있는 식당 광고판이다. 그래, 둘레길 걷는 사람들도 밥은 먹어야 하니.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나다녔는지 길도 반들반들하고, 짐승의 기척도, 그 흔한 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세상일이 조화롭기가 이처럼 쉽지 않다.
그러다 작은 물웅덩이에서 개구리 한 마리, 작은 뱀 한 마리를 겨우 만났다.
산중의 물웅덩이인데, 왜 산개구리가 아니고 참개구리가 있는 것일까? 옆에 있던 작은 뱀은 내 기척에 놀라서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숨어 버렸는데, 언뜻 보니 무자치 같았다.
'사무락 다무락'이라는 이름이 특이해서 사진으로 남겼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돌무덤(돌탑) 이름이란다. 길을 지나는 사람의 무사함을 빌던 돌무덤의 이름이 '사망(事望) 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에서 운율에 맞춰 변형된 것이란다. 지리산둘레길로 꾸며지기 전부터 지역민들이 이 옛길을 따라 양 지역을 오갔다고 한다.
유혹에 빠진 진짜 샛길
첫 번째 샛길을 만나고 계획을 바꿔, 정자나무쉼터(산속에 광고판 세워뒀던 그 식당)까지 갔다가 거기서 구룡폭포 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헌데, 예상에 없던 두 번째 샛길이 등장했다.
이 샛길은 막아두질 않아서 동네 주민들이 이용하는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길로 단축(?)해서 내려가보기로 생각했으나, 1차 시도는 실패. 거미줄이 너무 많아서 긴급 후퇴 ㅋㅋ 부러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 들고 다시 들어갔다.
걸리적거리는 나뭇가지에 허리 숙여가며 거미줄 치워가며 내려가니, 옆으로 묘지도 보이고 동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GPS 지도를 보면서 내려갔으니 망정이지, 아무것도 없었더라면 분명 헤맸을 거 같은 구간이 제법 많다. 열심히 거미줄 치우면서 내려오고 보니, 동네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아닌가 보다. 큰길 근처에서 돌무더기 가득한 공터와 만나는데, 다듬다만 집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정상적인 길은 아니었으니, 이 구간을 갈 일이 있다면 꼭 정규탐방로를 이용하라 권해드린다.
침전지
저수지도 아니고 사방댐도 아닌, 묘하게 생긴 것을 보고 뭔가 싶었다.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침전지란다. 마침 옆에 그늘 있는 벤치가 있어서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다 보니 눈앞으로 높은 지리산 자락이 보인다. 저기가 어딜까 하는 궁금증과, 저 안테나 어디서 봤는데 싶어서 기억을 막 추려내다 보니 정령치 휴게소다. 왼편의 높은 봉우리는 세걸산인가 보다.
침전지 벤치에서 밥을 먹고, 땀 좀 식히다가 구룡폭포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길 옆으로 구룡계곡이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내려다보니 물 상태가 심상치 않다. 언뜻 보고 물 위에 벚꽃 잎이 떠 있는 줄 알았다. 이 여름에??
구룡계곡 상류를 따라 마을이 있던데, 그 마을에서 나오는 생활하수가 개천으로 그냥 흘러드나 보다. 침전지 따위로는 해결되지 않을 상태로 보인다. 갈수기엔 얼마나 더 심각할지 상상이 안되네.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천룡암 앞에서 길의 윤곽이 파악되질 않아 잠깐 당황했다. 왼쪽의 '구룡정' 표지석을 따라 직진하면 된다.
구룡정 뒤편의 다리를 건너면 구룡폭포를 지나는 구룡계곡길이 시작된다.
구룡계곡길
오늘의 하산 아니 하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내려가는 길은 구룡계곡길을 따라간다.
구룡계곡길의 정비상태는 굉장히 좋다. 다만 계단이 많을 뿐...
구룡폭포가 있는 위쪽은 데크로 만들어진 잔도가 대부분이고,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계곡 옆을 나란히 가는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구룡정에서 출발하면 만나는 첫 번째 갈림길이다. 위로 가면 구룡폭포 주차장 방향이고, 아래로 내려가야 구룡폭포(육모정) 방향이다.
애초에 구룡폭포를 보러 왔던 길이 아니었던 터라, 갑자기 많아진 사람에 놀라, 육모정 방향으로 그냥 내려갈까 싶었다. 그러다 마음을 가다듬고 ㅎㅎ 대충 훑어보고 내려가기로 한다.
옆쪽 데크길까지 더 올라갈 수 있어 보이는데, 사람도 많고 하여 여기까지만 보고 내려간다.
잔도가 없었을 때는 어디로 지나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가파른 절벽이다.
구룡치를 넘어오는 중에는 사람 한 명 보지 못했는데, 구룡폭포 근방에는 어디서 단체로 왔는지 사람이 굉장히 많다. 마주치는 분들마다 한결같이 내게 묻은 말..
"구룡폭포까지 얼마나 더 가야 돼요?", "구룡폭포까지 다 와가요?"
처음엔 그 물음에 대한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런 계단을 보고 나서야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육모정에서 구룡폭포까지 가는 구룡계곡길이 처음 절반은 계곡 옆을 따라 걷는 순탄한 길이었다가, 후반 절반은 이렇게 계단으로 되어 있는 가파른 구간이 많다. 이런 심각한 계단을 만나니 차라리 산을 넘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ㅎㅎ
골이 어찌나 깊은지, 우리나라 산하 맞나 싶은 생각도 잠깐 든다.
멀리 보이는 계곡을 내려다보니 심각하던 상류 쪽보다 탁도가 조금 나아진 듯도 싶고, 비슷한가 싶기도 하고.
딱 중간쯤 위치한 이 이정표를 지나면서부터 길이 평탄해진다. 다만, 이쯤부터는 확연히 기온이 올라서 후끈해졌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조금 나아졌나 싶었던 계곡물의 탁도는 여전히 조금 아쉽다. 지리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수질이 가장 나쁘지 않나 싶다.
여느 산중 계곡처럼 맑았더라면 물비늘도 더 예뻤을 텐데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육모정
구룡계곡길은 탐방지원센터를 만나면서 끝났다.
구룡계곡 탐방지원센터 옆에 있는 다리(삼곡교)는 정령치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저 다리 반대방향으로 하산해야 출발했던 육모정으로 갈 수 있다.
육모정
여기서부터 육모정까지는 대략 300m, 육모정 공영주차장까지는 대략 700m쯤 되는 거리다.
이 보행로를 따라 육모정까지 내려가면 된다. 그늘이 많아서 내려가는 중에 뜨겁진 않았다.
여느 국립공원처럼 구룡계곡길 또한 전구간 계곡출입이 금지되는데, 육모정 앞은 7~8월 두 달간 피서객을 위해 계곡출입이 허용되는 곳이다. 땀으로 절여진 여름산행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지 않은가? 여기서 계곡물에 한번 들어갔다가 주차장 화장실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깔끔하게(?) 복귀했다.
사실, 계곡에서 마무리하는 여름산행을 처음 시도했는데, 그 결과가 나쁘지 않다. 아마 앞으로 마주할 여름마다 비슷한 산행지를 물색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룡산 국립공원, 상신리 → 장군봉 구간 산행 (feat. 폭염경보) (3) | 2024.09.21 |
---|---|
"기대 이상" 남덕유산 산행 (영각사 → 정상 → 서봉) (0) | 2024.06.20 |
"조난과 고난 사이" 주왕산국립공원 내원마을 - 가메봉 - 주봉 산행 (0) | 2024.05.26 |
북한산 의상능선 "사족보행" 산행 (2) | 2024.05.05 |
고흥 팔영산 산행 "오해 풀었네" (1) | 2024.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