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해남 달마고도 2회차 "11시 22분, 나는 삼나무숲에 있었다"

epician 2025. 4. 11. 09:09

첫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곳이라 금방 다시 올 줄 알았는데, 다른 계절에 곧 다시 올 줄 알았던 달마고도를 4년 만에 다시 찾게 됐다. 달마고도 첫 트레킹은 2021년 3월이었다.

 

봄소식 가득한 해남 달마고도 트레킹 1/2

준비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가 코로나 여파로 취소되는 바람에 급 한가해졌다. ㅎㅎ 덕분에 간만에, 정말 오래간만에 블로그 포스팅을 해본다. 블로그 포스팅도 못할 정도로 바빴던 사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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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

도솔암 경유 역방향 약 15km

지난 번에는 1코스부터 정방향으로 걸었으니, 이번엔 역방향으로 잡았다. 지난번에 못 가서 아쉬웠던 도솔암도 넣고. 대략 15km 정도 거리에 6시간 소요됐다.

출발

미황사 일주문

금요일이라 미황사 주차장이 아주 한적했다. 등산객은 서너 분 정도 본듯 하다. 1주차장 방향으로 걸어서 4구간부터 시작했다.

연등

곧 부처님 오신 날이라 곳곳이 오색연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화사한 봄꽃이, 봄꽃 마냥 화사한 연등이 칙칙했던 겨울의 색을 밀어낸다.

동백꽃

올봄은 늦은 추위 탓에 봄꽃들이 하나 같이 시원치 않게 피었다. 동백도 그렇고, 벚꽃도 그렇고.

스탬프투어 안내문 (기념품 지급)

이번엔 도솔암을 올라 가로지를 거라, 완주 인증이 불가능하다. 물론, 난 저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인증은 안 했을 거 같지만. 혹시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인증지점 7곳 놓치지 말고 꼭 챙기시라~

곤줄박이

여전히 달마산 미황사 근처엔 산새가 많다. 여러 종류의 새 가운데 곤줄박이와 찌르레기 정도만 거리를 가깝게 줬다.

부도암 사거리

부도암 사거리를 지나면서 부터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4년 만이자, 지난번과는 다른 방향이라 거의 모든 게 새롭다.

달마고도 이정표

달마고도에서 정말 좋은 것 중 하나가, 이정표 아닐까 싶다. 진행거리는 물론이고, 인근 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샛길마다 이정표가 정말 잘 세워져 있다.

달마고도

겨울 동안 일이 바빠서 운동을 못하고 지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그간 답답했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무겁던 마음 더 가벼워지길 바라며 여기서부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 뉴스속보를 들었다.

달마산 절경

오랜만에 보는 달마산에 눈이 즐겁다. 강물처럼 쏟아지는 너덜은 다시 봐도 놀랍고, 다른 세상 같은 저 산세는 언제 봐도 경외롭다.

현호색

봄 숲길 언저리에서 항상 만나는 꽃, 그 가운데 하나가 현호색 아닌가 싶다. 보통 청색이 많던데, 이 녀석은 변이가 온 것인지 자주색에 가깝다. 예전에 현호색 군락지에서 참 좋은 향을 맡았었는데, 저 꽃을 하나 떼어 냄새를 맡아보니 향이 하나도 없다. 아마 그때 그 향은 다른 꽃의 것이었나 보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살다 보면 잊기 어려운 날, 잊기 어려운 장면 몇 가지쯤은 생긴다.

4월 4일 11시 22분, 나는 마음 졸이며 달마산 삼나무숲길을 걷고 있었다. 헌법재판관의 서두 몇 마디에서 바라던 대로, 당연한 파면이구나 싶었지만, 그간 하도 이상한 상황과 판결이 많았기에 '파면한다'라는 그 확정적 표현을 듣기 전까지 마음 졸일 수밖에 없었다.

손뼉 치며 환호하며 그렇게 삼나무 숲길을 걸었다. 등산 중에 뉴스 생방송을 들어야 했던 기이한 추억이기도 하다.

삼나무 숲길

지난번에 왔을 땐, 이정표를 따로 못봤던 것 같은데, 이번엔 가는 중에 길이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지난 번에 걸었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삼나무숲을 지나는가 보다. 이정표를 보고 잠깐 고민하다가, 이번엔 삼나무숲을 거쳐 도솔암에 오르기로.

동백나무
삼나무숲

괜히 기운 빼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아닌가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그냥 지나쳤으면 서운했을 정도로 삼나무 숲길이 좋았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 마다 누군가의 수고와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삼나무숲 삼거리 이정표

이정표에서 도솔암 방향으로 진행했다.

도솔암

지난번에 왔을 때, 시간이 여의치 않아 못 갔던 도솔암을 이번엔 초반에 넣었다. 후반부에 지치면 또 마음이 바뀔까 싶어 ㅎㅎ

도솔암 방향 등산로

봄 햇살이 쏟아지는 숲길을 잠깐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도솔암 오르막길

밧줄 난간을 부여잡고 올라야 할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등산스틱을 안 가지고 다니다 보니, 이처럼 경사가 심한 곳은 난간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거친 숨 몰아쉬며 오르다 보면 절벽 같은, 요새 같은 봉우리에 자리 잡은 도솔암을 만날 수 있다. 달마고도 4구간 방향에서 오르면 도솔암 아래 첫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도솔암 삼성각을 볼 수 있다. 무작정 오르다 지나치면 다시 내려가야 할 수도 있으니, 놓치지 말자.

도솔암 삼성각

우리나라 불교에는 특이하게도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삼성각)이 있다. 불교가 특이한 형태로 토착종교와 결합했다고 봐야겠지. 여기까지 왔으니 산신령님께 내 소원 하나 빌고 간다.

삼성각에서 바라본 도솔암
아래에서 올려다 본 도솔암

큰 바위 봉우리 두 개 사이에 축대를 쌓아 땅을 다지고, 그 위에 암자를 지었나 보다. 켜켜이 쌓인 돌을 보니 정말 어떻게 저걸 해냈지 싶다.

도솔암 입구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대문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도솔암

도솔암은 아주 작은 1칸짜리 전각이다. 미황사 대웅전처럼 단청이 거의 없는 수수한 모습이다. 압도적인 위치에 자리 잡은 수수한 전각이라, 그 대비로 만들어내는 상징성이 크지 싶다.

도솔암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도솔암을 감싸고 있다. 바위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도 참 아름답다.

도솔암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도솔암 구경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길을 따라 몇 걸음 지나면 언덕 아래로 하산하는 길이 보인다.

도솔암 정상부 언덕
도솔암 안내판

이정표 옆으로는 간이 화장실도 보인다.

도솔암 부근 간이 화장실

정상부에 올라서고 보니 다음엔 산 정상부를 관통하는 종주산행을 해볼까 싶다. 다만, 5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 통제구간으로 묶여 있어서 정상부 능선길 대부분이 출입금지 상태다.

도솔암에서 내려가는 길

도솔암에서 달마고도 3구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경사가 만만치 않다. 오래전에 깔았던 야자매트는 분해되고 그 흔적만 겨우 남겼다. 비 내린 후에는 미끄러워서 오르내리기 어려워 보인다.

현호색

달마고도 3구간 진입

이정표

도솔암에서 내려와 달마고도 3구간과 합류하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정표에서 왼쪽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남은거리 10.6km

도솔암을 들렀다 오면 꽤 피곤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리 상태가 괜찮다. 근래에 운동을 조금 했던 덕분인가.

달마고도에서 바라본 완도

3구간에서는 바다 건너의 완도를 조망할 수 있다.

달마산 암릉

흙 한 줌 있을까 싶은 바위틈에 얹힌 진달래는 볼 때마다 놀랍다.

달마고도 3구간

예전보다 길 정비가 더 잘되어 있어 보인다. 꾸준히 관리가 되고 있나 보다.

흰제비꽃

몇 가지밖에 모르는 꽃 이름 가운데, 봄 숲 언저리에서 항상 보던 것들이라 제비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제비오는 시기에 피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였을 텐데, 아직 제비 소식은 없다. 날씨 탓이려나...

진달래

특이하게도 몇 발자국 거리 밖에 안되는데, 같은 진달래라도 색의 깊이가 꽤 차이가 난다. 그중 색이 짙던 개체.

동백꽃

여러 봄 꽃 가운데, 내겐 동백꽃이 가장 인상적이다. 빨리 피고, 어느 것도 범접하기 어려운 색깔에, 그 모양 그대로 땅에 떨어져 마치 땅에서 피어난 듯한 모습으로 진다.

동백꽃 낙화
동백꽃 낙화

3월 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동백꽃 구경을 갔었는데, 아쉽게도 개화시기가 못 맞췄다. 이제 막 피기 시작했었는데, 그 후로 이십여 일이 지났음에도 동백꽃 개화 상태가 썩 좋지는 못하다. 아마 잦고 길었던 꽃샘추위 탓 아닌가 싶다.

달마고도
달마고도
숲 너머로 보이는 달마고도 정상부 암릉

달마고도 2~3구간은 바다도 조망할 수 있고, 달마산 암릉도 조망할 수 있어서 심심할 틈이 없다. 길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완도 방향 조망
달마고도
달마산 암릉

성벽 같은 달마산 암릉에 얹혀 있는 하이에나 닮은 저 바위도 잘 있다.

달마산 암릉
달마고도
흰 제비꽃 군락

달마고도 2구간

미라골잔등 삼거리 이정표

돌아나가는 능선길이 보이길래 큰바람재인줄 착각했다. 하긴 벌써 끝날 리가 없지.

너덜지대

이 굵은 바위가 정상부 암릉에서 떨어져 나왔을 텐데, 그 먼 옛날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달마산 너덜지대
청띠신선나비

그 매서운 겨울을 용케 버틴 녀석이 바위에서 체온을 올리려 해바라기 중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는 방향으로 계속 날아가 앉는다. 본의 아니게 녀석의 해바라기를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달마고도
달마고도
달마고도

달마고도 1구간

관음암터를 지나 큰 바람재 도착하면 달마고도 1구간으로 접어든다.

관음암터 연못

멀리서 보니 연못에 생이가래가 떠있는 것 같아서 아주 반가웠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생이가래가 아니고 오리나무 꽃이 떨어진 것이다.

연못 안 올챙이

연못 안에는 도롱뇽 알도 보이고, 산개구리를 비롯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올챙이들이 제법 많다. 뭘 먹고사나 궁금할 정도로 신기한 생태계다.

큰바람재 이정표

큰 바람재를 지나면 달마고도 1구간에 접어들며 달마산 서쪽 사면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달마산 서쪽 사면
달마산 서쪽 사면

마치 다른 행성 같은 풍경이다. 저 멀리 카네 코르소(이탈리아 마스티프) 닮은 바위가 보인다.

카네 코르소처럼 보였던 바위

사면에 펼쳐진 온갖 모양의 바위를 감상하느라 가다 멈추길 여러 번을 반복했다.

임도 구간 합류

달마고도 1구간 임도에 합류하고 보니, 예전에 이쯤에서 인증사진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그 이정표를 찾아서 같은 포즈로 인증샷을 남기고 미황사를 향해 계속 걸었다.

달마고도 1구간 임도
매화

그늘진 임도 가장자리에 매화가 피었다. 양지바른 곳이었다면 진작 꽃을 피우고 졌을 텐데, 이 시기에 매화를 보니 너무 반갑다. 겨우 한 그루지만, 그 향기는 아쉽지 않을 정도로 그윽하다.

매화
동백꽃

아름드리 동백나무 아래로 떨어진 꽃을 모아, 누군가가 하트를 그려놓았다. 그 사랑 영원하길 기원한다.

동백꽃 낙화
벚꽃

3월 말이면 만개했을 벚꽃도 올해는 추위 탓에 개화가 늦다. 만개했으면 꿀벌 나는 소리로 가득했을 풍경인데, 올해는 벌소리도 약하다.

소회

작년 12월엔 두륜산 산행을 했었으니, 최근엔 해남 쪽으로 산행을 자주 오고 있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달마고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멋진 풍경과 여유를 안겨줬다. 그래 어느 해던, 걸을 수만 있다면, 봄엔 여유롭게 둘레길 걷는 호사 정도는 누리고 살아야지.

산불방지 통제기간 끝나면 달마산 정상부를 걸어볼 생각이다.
건강하게 다시 보자 달마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