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
올 겨울쯤엔가, 변산반도 국립공원인 전북 부안의 내변산을 가볼까 싶었다. 내변산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코스가 대중교통 연계가 가능하여, 여러 이동경로를 비교한 끝에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를 거쳐 부안으로 들어가는 걸로 확정 지었다.
사고
부안행 버스 환승을 위해 광주로 가던 중,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시외버스 뒷바퀴 부근에서 뭐가 터지면서 실내 바닥이 뚫리는 사고 일어났다. 처음엔 바퀴가 터진 줄 알았는데, 이후 출동한 경찰관들 얘기에 의하면 바퀴는 멀쩡하고 다른 게 터진 것 같단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의 바로 앞자리에서 바닥이 뚫리는 폭발사고가 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사람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떠오른다. 후회 없으려면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데, 참 어려운 일이다.
환승 실패
부안행 버스 환승까지 1시간 정도 넉넉하게 시간이 있었으나, 사고 이후 도착한 대체버스가 광주 문화동 정류장을 거쳐가는 버스라 부안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사고가 난 이후에 순천에서 대체차량이 올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당연히 예비차량이 오는 줄 알았다. 헌데 막상 도착한 버스는 이미 운행 중이던 차량이었고, 우리를 빈좌석에 태우는 정도였다. 경유지가 있는 차량이다 보니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더 늦어져 환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금호고속이라는 큰 회사의 대응이 이처럼 미흡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고가 난 이후에 터미널에 도착하면 직원이라도 나와서 피해상황 없는지 대응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런 건 없었다. '본인 피해는 알아서 신고하세요' 라는 태도인가 싶어서 씁쓸했다.
무등산으로 행선지 변경
스케줄이 꼬이고 나니, 멘탈이 살짝 나가서 뭘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예전에 무등산 규봉암엘 가보고 싶어서 만들어뒀던 GPX 코스를 발견했다. 터미널 푸드코트에서 아침밥을 먹고 무등산엘 가기로 결정.
약 13km에 5시간 20분이 소요됐다. 장불재에서 서석대 쪽으로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중머리재 방향으로 내려왔다.
원효사
원효사 부근에 당도하니 제법 굵은 비가 내린다. 어떻게 해야 싶은 고민에 고민이 더해진다. 시내버스에 등산객 5명 정도가 탔었는데, 3명은 등산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것 같았고, 날 포함해서 2명만 무등산을 향해 오른다.
다행히 빗줄기는 가늘어졌다가 다시 잠깐 굵어지기를 반복한다.
촉촉이 내리는 비에 공기도 상쾌하고 낭만도 넘치는데, 가끔 몰아치는 돌풍이 무섭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 나뭇잎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우산을 쓰기도 그렇고 안 쓰기도 그렇고, 참 여러모로 애매한 상황이다.
국립공원 내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지 싶다. 탐방로 인근에 별장처럼 생긴 집이 두 채가 있었는데, 이런 곳은 습기 때문에 사람이 살긴 좀 힘들지 싶기도 하다.
전날 비가 오기도 했고, 당일까지도 비가 오락가락하던 터라 드문드문 물웅덩이가 생겼다. 불편하기보다는 나름 운치가 있었다.
출발한 지 20여분 쯤 지나니 운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발 600m가 넘는 지점이라 이런 날씨에 운무가 이상하진 않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살짝 당황스럽긴 하다.
킹덤의 그곳
드라마 '킹덤'에서 봤던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개 가득한 숲 너머에서 뭐가 하나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
익숙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낭만적인 경험에 가까웠다.
꼬막재
원효사에서 꼬막재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가, 꼬막재에 도착하면 장불재까지는 둘레길에 가까운 평탄한 길이다. 길도 넓고 정비상태가 좋아서 우산 쓰며 걸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우산을 챙겼던 게 신의 한 수 ㅎㅎ
여기저기 피어 있던 노란 꽃이 인상적이었다. 정확하지 않으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피나물인가 보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탐방로 드문드문 앙증맞은 계곡이 생겨났다. 낭패로 시작했던 산행에서 소소한 눈요기거리를 찾다 보니 낭만으로 바뀌어 간다.
늦게까지 남아 있는 철쭉이 꽃길을 꾸며놓았다.
최강의 운무
산행 중에 운무를 만난 적이 몇 번 있긴 한데, 강도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이번에 무등산에서 만난 운무가 최고치 아닌가 싶다. 규봉암에 가까워지니 운무가 어찌나 짙어지는지.
여기까지 오는 중에 산 아래로 탈출할 수 있는 이정표를 보고 몇 번 고민했다. 후퇴를 할지 말지 ㅎㅎ
탐방로에 너덜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규봉암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챘다.
규봉암
규봉암 이정표를 보고서 규봉암 부근이겠거니 했는데, 짙은 안개 탓에 바로 코 앞이 규봉암인걸 몰랐다. 고개를 들어 안개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니 희미하게 담장이 보였다.
나무가 마치 바위를 뚫은 듯 자라났다. 악조건 속의 경이로운 생명력 아닌가 싶다.
일주문과 비슷한 역할을 할 전각이 보인다. 목재 상태를 보니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실제 출입구는 전각 옆으로 따로 있었으니, 정확히 따지면 (아직까진) 문 역할을 하진 않는다.
규봉암 입구에 일부로 꽂아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찾아보니 삼존석이라고 부르나 보다.
날씨 탓에 크게 기대를 안 했지만, 이렇게 까지 아무것도 안 보일 줄은 ㅠ.ㅠ
규봉암 뒤편이 무등산의 3대 절경으로 꼽히는 광석대인데, 날씨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윤곽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 보일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서석대, 입석대와 함께 3대 주상절리인데, 그 마지막 하나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아쉽지만, 그 또한 다른 연이 이어질 계획이겠거니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장불재
장불재에 가까워지니 안개가 더 짙어진다.
모양은 붉은병꽃나무 같았는데, 색이 달라서 찾아보니 종이 다른가 보다. 병꽃나무는 노란 꽃이 피었다가 붉게 변한단다.
무등산에 올 때마다 만나는 장끼. 등산객을 워낙 자주 마주치는 탓인지 경계심이 적다. 힐끗힐끗 곁눈질하며 여유롭게 숲 너머로 사라진다.
장불재에 도착해서 꽤 당황했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운무가 짙어서 쉼터도 쉽게 못 찾겠고, 심지어 방향감각에도 혼란이 일어난다.
원래 계획은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서석대를 거쳐서 바람재 방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서석대에 가봐야 아무것도 안보이겠지 싶다. 잠깐 고민하다가 돌풍도 거세고 하여, 중머리재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중머리재
꼬막재 방향으로 올라올 때는 그다지 미끄럽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중머리 방향 하산길은 미끄러운 바위가 가끔씩 있다. 잡생각을 잠시라도 할라치면 발이 미끄러지기 일쑤다.
짙던 안개가 중머리재 부근에 도착하니 그나마 많이 걷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었는데, 중머리재 부근에선 산 아래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옅어졌다.
날씨 탓에 경치 구경은 다 틀렸으니, 그나마 어딘지 식별이 가능한 중머리재에서 인증샷 하나 남기고 하산을 이어갔다.
하산 완료
날씨 탓에 길이 좀 미끄럽긴 했지만, 별 탈 없이 하산을 마쳤다.
안개 낀 습한 날이라 그런지 계곡의 이끼가 빛이 날 정도로 푸르다.
계획에 없던 무등산 산행이었지만, 오랜만에 낭만적인 산행을 즐기지 않았나 싶다. 딱 적당한 정도의, 가벼운 우중산행.
안개 탓에 못 본 광석대는 다음을 기약한다.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대가 너무 컸던" 속리산 문장대 - 천왕봉 산행 (0) | 2025.07.14 |
---|---|
"시티뷰 + 오션뷰" 여수 마래산 산행 (0) | 2025.06.04 |
해남 달마고도 2회차 "11시 22분, 나는 삼나무숲에 있었다" (2) | 2025.04.11 |
"장비부실로 패퇴한" 민주지산 삼도봉 산행기 (2) | 2025.03.15 |
"1시간 남짓이면 충분" 여수 종고산 둘레길 (1)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