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통영 미륵산 산행

epician 2022. 3. 15. 18:07

오래전에 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미륵산 산행 장면을 봤는데, 그 풍광이 꽤 멋져서 기회 되면 가봐야지 생각했었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To-do 리스트에서 밀리고 밀려 그 끝자락 어딘가 쯤에 걸리게 되었다.

엊그제 거제를 다녀와야 할 일이 갑자기 생겨서 돌아오는 길에 기억에서 한참 멀어졌던 미륵산 산행을 즐기고 왔다.

산행 경로

산행경로

봉평동 해안가에서 시작해서 도솔암, 미륵산 정상을 거쳐 용화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대략 7KM 정도의 코스이다. 중간에 전화받느라 멈춰 있었던 30분,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맨 시간 10분 정도를 빼면 대략 2시간 20분 정도 소요된 듯하다.

너무 오래전에 계획했던 산행이라 당시에 만들어둔 GPX 파일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걸 참고해서 산행하다가 길이 안 맞는 바람에 좀 헤맸다.

산행시작

봉평동 해안가

자주 보던 바다라서 지겹거나 그렇진 않다. 해안선 너머로 집 한채만 바뀌어도, 지는 해 너머로 구름 한 조각만 바뀌어도 그 풍경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거리 구경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해안가 쪽에 주차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륵산까지 올라가는 거리가 참 예쁘다.

거리 뒤편에 걸린 미륵산 정상부 모습
거리 풍경 #1
거리 풍경 #2

벚꽃 필 때 와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리다. 오래된 주택을 상가로 개조한 곳이 많아서 서울의 어색한(이색적인) 골목길을 걷는 느낌도 나고 그렇다.

산행초반

버스 종점부터 인근 사찰까지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인데, 경사가 제법 있으나, 크게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인근 사찰까지 가는 길
인근 사찰까지 가는 길
나무에 걸린 글귀

이 글귀를 보자마자 드는 첫 생각. "이거 싸움 나겠는데?"

사찰까지 이어진 콘크리트 길을 벗어나면 잘 정비된 등산로가 나타나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앞서 언급한 오래된 GPX 파일 탓에 좀 헤맸다.

등산로

잘 정리된 편한 길을 걷다 보면 중간쯤 쉼터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경사가 조금 올라간다. 뭐 그렇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자.

쉼터

쉼터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뒤편으로 바짝 솟은 미륵산 정상부가 보인다. 저걸 보고 잠깐 쫄았으나, 거리가 짧아 눈에 보이는 경사에 비하면 어렵지 않았다.

길 뒤편으로 보이는 미륵산 정상부

미륵산 정상부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바윗길

이 장소를 예전에 미륵산 산행 다큐에서 봤었는데, 이렇게 작았단 말인가? 화면으로 볼 때는 웅장한 느낌이었다. 내 기억의 오류 탓인지, 다소 실망했다. 여기서부터는 동네 뒷산(여수 호랑산) 올라가는 느낌하고 싱크로율이 아주 높아진다.

미륵산 정상부 바위
미륵산 절벽 끝의 소나무

분재에서 많이 보던 모양새다. 일부러 가꾼 것도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멋지게 자랐나 싶다.

핵당황

산에 가서 당황했던 경험이 몇 가지 있는데, 미륵산 산행에서 당황스러움의 레벨로 치면 꼭대기층을 하나 갈아치운 것 같다. 하산하던 중에 해가 진다든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깜깜해진 후에야 엉뚱한 곳으로 내려왔다든지, 뭐 그런 꽤 당황스러운 기억이 있다.

미륵산 정상에 도달하니 내 근처에서 누군가 화장한 유골을 뿌리고 있다. 그 냄새를 맡았을 때, 진심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순간 뇌의 모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위법여부를 떠나, 케이블카까지 놓여 관광객들 득실득실한 산 정상에서, 그것도 등산로 바로 옆에서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되더라. 그때는 뇌기능이 정지되는 핵당황 상태라 인상만 쓰고 말았는데, 다시 돌이켜보면 멱살이라도 잡았어야 했나 싶다.

정상

미륵산 정상 표지석

기분을 제대로 잡치고 나니, 언짢은 심경에 주변 풍경이 곱게 들어올 리 없다. 이른 아침에 안개가 조금 끼더니,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연무로 잔뜩 흐리다.

미륵산에서 내려다 본 통영
미륵산 봉수대 부근 풍경
영운항 방향 미륵산 풍경
케이블카

하산

정상부를 대충 둘러보고 용화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하산길 초반부

하산길 초반에는 바위로 맞춰놓은 계단길이 조금 있는데, 너른 쉼터를 지나면서부터는 걷기 좋은 오솔길로 바뀐다.

하산길 #1
하산길 #2

산행종료

용화사 옆길

잘 관리해 놓은 오솔길을 재밌게 걷다 보면 용화사에서 부근에서 큰길과 만난다. 보통 산에 오면 근처에 있는 큰 절은 꼭 들어갔다 나오는 편인데, 이 날은 여러모로 언짢아서 절에 들어갈 기분이 나질 않는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지나쳤다.

해저터널

올라왔던 예쁜 거리(봉수로)를 천천히 걸어내려 가서 주차했던 곳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시간이 좀 남길래, 인근 해안가와 해저터널까지 구경했다.

충무교
해저터널 입구의 지붕
해저터널 입구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터널로 그 옛날에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안쪽을 걷다 보면 건설 당시의 사진을 전시해두었는데, 상상보다는 어렵지 않은 공법이었다. 간조 시기에 맞춰 좁은 수로의 양쪽에 둑을 쌓아서 물을 빼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터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공법이다.

현재는 보행로로만 사용되고 있고, 측면에 볼록 튀어나온 구조물 안으로 상수도관이 지난다.

해저터널 입구 지붕

물론 새로 만들긴 했겠지만, 나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요즘은 저런 목재 구조물 보기가 쉽지 않아, 몹시 반갑다.

해저터널

반대편까지 길이는 대략 500m 쯤 되는데,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충무교를 건너서 왔다.

충무교 위에서 바라본 해안선

안개 끼고 흐린 날씨 탓에 사진이 죄다 엉망이다.

이번 통영 미륵산 산행은 즐겁지 못한 경험이 몇 가지 겹치다 보니, 좋은 기억으로 남을지 확실치 않다. 내 기억이 그렇다고 해서 좋던 풍경이 나빠질 리는 절대 없으니, 아름다운 해안가 풍경이 그리운 분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훌쩍 다녀오시라.